정신건강은 자아에 대한 고민이 없을 때 비로소 회복된다.
영양제를 검색하다가 피곤한 몸을 ‘관리’ 하지 못한 나 자신을 또 한 번 질책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 마주하는 이 지독한 피로감은 정말 게으름의 증거일까? 나름 치열하게 살아온 입장에서 억울함이 밀려왔다. 피곤함이 삶의 기본값이 될 것이라 예감했던 십 대의 나는 정말이지 어른이 되기 싫었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결국 나도 별게 다 피곤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진짜 비극은 이 피로감이 우리를 지독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매몰시킨다는 점이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상태, 불행에만 돋보기를 들이댄다. 내가 ‘내면을 돌본다’ 거나 ‘자아를 성찰한다’는 표현들을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칫 건강한 반성이 아니라 자의식만 비대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잘 쉬는 법’이나 여행 같은 새로운 경험들을 권유하곤 한다. 다 좋은 마음이겠지만, 나에겐 그게 영 ‘가짜 평화’ 같아 괴로웠다. 심지어 그런 활동들은 육체적 피로 위에 ‘돈까지 들였으니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는 정서적 부채까지 얹어주는 기분이었다. 실제 그런 <평화 찾기 운동>들은 내 무기력을 고쳐주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구원한 건, 내 자아가 실종될 정도로 무언가에 ‘정신이 팔렸을 때’였다.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이라는 질문을 마주한다. 나는 이 대립항이 인류가 발명한 가장 멍청한 질문 중 하나라고 확신한다. 이 질문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실제의 나보다 '관념 속의 나'를 비대하게 만든다. 현실과 나 사이의 괴리는 커지고, 타인의 비판 한 마디에 유리 멘탈이 바스러지는 ‘자의식 과잉’의 늪. 이 프레임은 우리에게 경제적 상수와 개인의 기질을 영민하게 계산하라고 압박하며, 우리를 영원히 자기 계발서의 인터뷰지 속에 가두어 버린다.
돈 앞에서 청순한 척하는 태도는 나 역시 경멸한다. 다만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정신적 건강은 필수적이며, 그 건강함은 역설적으로 자아에 대한 고민이 사라질 때 찾아온다. 일이나 취미를 거창하게 고민하기 전에 반드시 '나의 흥미'를 먼저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밤새 폰 화면을 공들여 꾸미거나, 쓸데없는 정보를 수집하는 아주 사소한 것일수록 좋다. 아니, 사소할수록 안전하다. 돈을 벌다가 갑자기 존재론적으로 ‘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기 자신과 너무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정신건강은 자아에 대한 고민이 없을 때 비로소 회복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너 그거 할 때 정말 신나 보이더라, 정신 나가 보이던데 계속해봐!” 같은 격려를 건네는 이는 드물다. 우리는 오직 ‘잘’하는 것만 칭찬받고, 좋아하는 것은 ‘대책 없는 짓’으로 분류하는 데 익숙해졌다. 쓸데없지만 재밌는 일에 침잠하는 것을 공포로 여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몰입이야말로 진짜 자아로부터 떠나 세상 그 자체에 침잠해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나는 예쁜 포장지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포장지만 꾸미다가 정작 알맹이가 뭔지 까먹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어른의 품격’이란 대개 알맹이 없는 상자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감싸느냐의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들어졌다가는, 정말 다 같이 단체로 ‘번아웃 쇼’라도 하게 될지 모른다. 각자의 사소한 ‘미친 짓’으로 숨어들 구멍조차 막아버린 사회의 결말은 대개 너무 퍽퍽했으니까.
이제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재밌는 짓을 계속해야 인간은 꾸준히 돈도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좋아하는 일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