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라는 이름의 무례, 인과론이라는 감옥

by 호하은
세상엔 이유 없이 맛없는 김밥도 널려 있는데, 왜 내 감정은 항상 논문처럼 완벽한 각주를 달아야 하는 걸까?


오래된 친구가 있다. 나를 아끼고, 내가 힘들 때면 언제든 달려와 주는 고마운 친구다. 그런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대체 이유가 뭐야?” 모든 우울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듯 재차 묻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가끔 연락이 끊기던 나를 너그럽게 기다려주었다던 친구가 갑자기 역정을 내며 해명을 요구하자, 나는 내 상태를 가리기 위해 시시콜콜한 거짓말이라도 지어내야 하는 건 아닐지 검열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우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부터가 피곤한 일이다. 세상엔 이유 없이 맛없는 김밥도 널려 있는데, 왜 내 감정은 항상 논문처럼 완벽한 각주를 달아야 하는 걸까? 내 우울에 정당한 영수증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성실한 세계관에 큰 결례라도 되는 것 같아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질문은 지극히 '표준적'이다. 우리는 모든 결과에 상응하는 원인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로 들여다본 현실은 내 당혹감보다 훨씬 거대하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국내 우울증 환자는 이미 11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110만 명이라니. 이쯤 되면 우울은 질병이라기보다 하나의 트렌드에 가깝다. 이렇게나 동지가 많은데, 우울한 사람들을 위한 전용 차선이나 커피 할인 혜택이라도 생기지 않는 게 의아할 지경이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친구의 질문보다, 내 안에 뿌리 깊이 박힌 ‘인과론’에 대한 강박이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명확한 원인이 있을 거라 믿는 학습된 고집은, 어느 순간 내 내면을 향한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는 확신은, 명확한 서사가 없는 우울을 '근거 없는 태만'으로 분류하게 만든다. 원인을 찾지 못하면 아플 자격조차 없다는 그 지독한 논리가 결국 내 우울을 키우는 가장 큰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친구의 질문은 단지 내 안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그 가혹한 심문에 불을 지폈을 뿐이다.


내가 수십 년간 다듬어온 나의 기질을 누군가 ‘문제’ 삼는 일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나는 본래 밝은 사람이지만, 우울 또한 나라는 사람의 거부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이 둘은 결코 상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을 ‘제거해야 할 이물질’로 보는 순간, 우울은 더 나쁜 방식으로 나를 잠식하려 든다. 친구에게 내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과 그 구체적인 이유를 언어로 만들어 바치는 일은 사실상 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었다.


지금처럼 성과와 효율이 신앙이 된 세상에서 '보통의 감정'을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노동이다. 아침에 일어나 무사히 출근하고, 타인과 적당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평온한 얼굴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 이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젖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늪을 건너는 것만큼이나 처절한 사투일 수 있다. 110만 명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서로에게 더 정교한 질문을 던지기보다, 서로가 처한 '고단함의 상태'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다.


그럼에도 내가 친구의 무례함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례함이 나를 향한 정교한 공격이라기보다 그의 내면적 불행이 통제력을 잃고 밖으로 새어 나온 흔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질문이나 짜증은 대개 나라는 표적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 삶의 소음이 삐져나온 결과물일 때가 많다. 우울에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고 다그치던 친구의 조급함 역시, 어쩌면 자신의 삶은 안전한 인과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불안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불행을 '해결 가능한 문제'로 규정해야만 자신의 평화도 지켜질 수 있다고 믿는 가련한 방어 기제 말이다.


이유 없는 우울이 그저 '오늘의 날씨' 같은 것이듯, 타인의 무례함 또한 그저 '그가 처한 계절의 소음'일뿐이다. 그 소음이 내 방 안까지 침범하지 않게 두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계절을 온전히 존중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아끼는 이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서운함은 피할 수 없겠지만, 구구절절 나를 해명하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서로의 내면에 더 깊은 평화와 안녕을 안겨줄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예의이자, 스스로를 가두었던 인과론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는 첫걸음이다. 110만 명의 한숨이 섞인 이 공기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위로는 '이유를 묻지 않는 곁'이 되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