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아직 이름이 없는 정문사書의 고양이는 오늘도 시크했다.
책장 사이를 가볍게 미끄러지듯 걸으며, 햇살 드는 창가에 먼저 눕더니 졸린 눈을 반쯤 감았다.
마치 이 서점이 자기 것이라도 되는 듯 당당한 눈빛과 걸음걸이로, 고양이는 이곳의 주인이 되었다.
“근데 얘는 이름이 뭐예요?”
은수는 책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설탕의 딸, 쌍둥이 중 동생이었다. 옆에 서 있는 언니는 팔짱을 끼고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귀여운데 이름이 없다고요?”
"아직... 못 지었어요. 그냥 ‘고양아’라고 부르면 오긴 해요.”
“ 헐. 너무 슬프다. 우리 고양이 이름 지어줘요!”
뜻밖의 선언에 설탕이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손님들도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공모전이죠.”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소 진지하게 말했다.
“책방 고양이니까, 책 관련된 이름도 좋을 거 같아요!.”
그날 오후, 정문사 입구 칠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혔다.
정문사 고양이 이름 공모전
책방의 마스코트, 아직 이름이 없어요!
이름 후보를 적어주세요. 투표로 결정합니다!
이름 공모전에 대한 관심은 기대이상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님들이 칠판에 줄줄이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설탕은 고개를 갸웃하며 누군가를 떠올리듯 말했다.
“‘다니엘’은 어때요? 분위기도 있고..."
“귀요미!" "찹쌀떡이요!”
쌍둥이 자매는 동시에 외쳤다.
중년 시인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카프카! 고양이 눈을 보고 있노라면 실존주의적 영감이 떠오릅니다.”
책 인증숏을 찍는 20대 손님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문이’ 추천이요.
정문사書의 문지기 같은 느낌으로 인스타그램 태그 감성으로 찰떡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은수에게 향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
"저는... 사실 냥콩이요.”
“네?”
“그냥... 콩처럼 작고, 조용하지만 냥냥거리기도 하고... 그래서 냥콩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 정적을 깨트린 건 쌍둥이 중 동생이었다.
“헐! 냥콩이 정말 귀여워!!”
“언니 언니, 이름 천재 아니야?”
“고양이 이름 짓기 천재! 지니어스!”
순식간에 서점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두 아이는 서로 손뼉을 마주치며 ‘냥콩이 송’을 즉석에서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은수는 어쩔 줄 몰라 웃음만 흘렸다. 고양이는 관심 없다는 듯 책상 위에서 하품을 하며 다리를 쭉 뻗었다.
며칠 후, 투표함을 열기 직전
고양이는 천천히 걸어가더니 한 권의 책 위에 털썩 몸을 눕혔다.
『위대한 개츠비』
“이름 정해졌네요.” 설탕이 말했다.
“개츠비라... 낭만적이고, 우아하고, 좀 슬프기도 하죠. 고양이랑 잘 어울려요.”
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요. 오늘부터 이 아이는 개츠비예요.”
책방 손님들이 박수를 쳤고, 쌍둥이 자매는 조금 아쉬운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문을 나서기 전, 설탕이 은수에게 조용히 말했다.
“전 사실, 냥콩이도 좋았어요. 은수 님 마음이 느껴지는 이름이었어요.”
책방이 다시 조용해지고, 개츠비는 햇살이 드는 자리에서 다시 잠들었다.
은수는 고양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개츠비... 아니, 냥콩아.
오늘도 잘했어. 네가 있어서 위로가 된다.”
그리고 책방 불을 끄고 돌아서기 전, 은수는 오래된 작은 노트를 꺼내 들었다.
겉표지에는 연필로 적힌 단어 하나.
“이름”
그 아래에 은수는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방 고양이 이름 짓기 대소동〉
이름을 짓는다는 건
어떤 존재에게 처음으로 말을 거는 일일지도.
오늘, 다시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본다.
책방 안의 공기는 고요했고, 창밖에서 부는 바람은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올 거라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