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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던 날, 국제갤러리

by 온정선

우울하고 추웠던 겨울,

아침 산책을 하다 삼청동까지 걸어갔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려

바닥이 축축하던 도시를

묵묵히 걸으며

대지가 내 몸을

조금씩,

천천히

잡아당기듯

녹아내리듯

가라앉는 기분으로

도착한 국제갤러리


온통 하얀 벽면 위에

바스키야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림인 듯

낙서인 듯

하지만 생생하게


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앞에서 웃었다

아주 작지만

왜인지 무엇인가

해결이 된 거 같은 웃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장면이 무한 반복된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조용하고도 또렷하게


그의 생애는 잘 모른다

그저 나는

그날,

그 그림 앞에서

다시 걸어갈 힘을 얻었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이

그림의 힘인지,

전시의 힘인지

혹은 그날의 기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다른 도시에서

다시 바스키야의 그림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감정도,

어떤 울림도 없었다


아마도

오래전

그날에만 가능했던

아주 특별한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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