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손에 든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표지를 한 번, 그리고 책장을 가볍게 넘기며 몇 줄을 읽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책 딱 한 권만 소장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책으로 충분할 것 같아, 개츠비.”
책방 고양이 개츠비는 오늘도 책방 구석, 햇살이 스미는 자리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몸짓은 마치 은수의 말에 동의하는 듯 느껴졌다.
'그렇다면 딱 하나의 곡만 남겨야 한다면,
그 곡은 과연 무엇일까?’
그 순간, 은수는 라디오헤드의 「Creep」이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때, 남자친구가 빨간 카펫이 깔린 멋진 음악소리방에서 처음 들려줬던 곡.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그 사람,
하지만 그날의 온도와 그 곡의 첫 음은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그때 그 노래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 시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외로움이, 그 멜로디에 조용히 숨었었다는 것을.’
은수는 스피커에 손을 얹고, 「Creep」을 재생했다.
잔잔히 공간을 채워오는 기타 소리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어떤 날것의 진심.
책방 전체가 음악에 젖어드는 듯했다.
책장이 바람에 넘겨지는 소리조차 그 순간에는 하나의 멜로디처럼 들려왔다.
조용한 책방의 분위기 속, 한 여자가 천천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깊은 눈을 가진, 입고 있던 카키색 남방이 멋스럽게 어울리는 여자가 책을 덮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 노래, 오랜만에 들어도 언제나 참 좋네요. 책방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은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음악은 사람과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체 같아요.
그날그날의 기분이나, 오신 분들 분위기에 맞춰 고르죠.”
“그래서 오늘은 이 노래인가요?”
“네, 갑자기 듣고 싶었어요. 오늘은 그런 날이거든요.”
손님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가끔 그런 날이 있어요. 그냥 이유 없이, 어떤 곡이 꼭 필요해지는 날.”
그녀는 책방 한쪽, 작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러다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혹시 듣고 싶은 노래를 적어도 될까요?”
“그럼요. 여기에 적어주세요.”
은수가 내민 메모지는 작고 투박한, 황토색 포스트잇이었다.
그녀는 작고 조심스러운 글씨로 원하는 음악을 적어 내려갔다.
그 글자들엔 무언가 아련하게 잊고 있었던 감정이 고요히 깃들어 있었다.
은수가 소리 내어 읽었다.
“박새별의 ‘물망초’, 김형중의 ‘그랬나봐’ ”
“두 곡 모두... 잊을 수 없는 어느 계절의 기억이에요.
누군가와 함께 듣던 곡이었거든요.
그 사람은 이제 제 곁에 없지만, 노래는 아직 제 마음에 남아 있어서…”
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참 좋은 선택이에요. 다음에 꼭 틀어드릴게요.
두 곡 모두, 마음을 조용하게 다독여주는 노래들이잖아요.”
그 순간, 개츠비가 은수의 다리에 살며시 몸을 비볐다.
마치 자신도 이미 그 노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리고 편안하게 다시 웅크려 앉았다.
그날 이후, 정문사書에는 가끔씩 손님들이 신청한 곡들이 잔잔히 흘렀다.
책방을 찾는 손님들은 어느새 음악과 함께 자신만의 기억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또 누군가는 다 읽은 책 옆에 조용히 눈을 감으며 추억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은수는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속삭였다.
“음악은 참 신기하죠.
책처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 같아요.”
개츠비는 음악이 흐를 때면 늘 은수의 무릎 근처로 다가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소리를, 그 공기를, 그리고 그 마음들을 이해한다는 듯.
책방의 문이 닫힌 늦은 저녁, 은수는 고양이 개츠비가 올라간 테이블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날 마지막 손님이 골라간 책을 정리하다가, 은수는 무언가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책 한가운데, 얇게 접힌 노란 포스트잇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글씨는 여전히 작고 단정했다.
“그날 그 음악과 책방이,
생각보다 오래 저를 안아주었어요.
고맙습니다.”
은수는 아무 말 없이 포스트잇을 책상에 눕히고, 조용히 스피커를 켰다.
그날 틀었던, 박새별의 「물망초」가 다시 흘러나왔다.
개츠비는 음악 소리를 듣자마자 은수 곁으로 다가와 무릎 근처에 동그랗게 앉았다.
은수는 고양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렇지? 개츠비”
다음날, 은수는 계산대 옆에 작은 유리병을 하나 두었다.
옆에는 짧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 말하지 못한 말, 듣고 싶은 음악을 적어주세요.
이곳엔, 누군가의 마음이 언제나 머물 수 있기를.]
그리고 정말로, 하나둘씩 노란 포스트잇이 병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어떤 포스트잇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그냥, 울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책방 덕분에 참았어요.”
또 다른 메모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첫사랑과 함께 들었던 노래가 문득 떠올랐어요.
토이의 ‘좋은 사람’ 혹시 틀어주실 수 있을까요?”
책방은 여전히 조용한 골목에 있었지만, 이제는 매일 조금씩 다른 이야기와 음악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개츠비는 여전히 은수의 무릎 근처를 좋아했고,
음악이 흐를 때마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