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금요일. 책방의 오후는 느린 음악처럼 흐른다.
은수는 그 흐름을 붙잡고 오늘도 책방 한쪽 조용한 자리에서 무심코 꺼낸 낡은 기억 하나를 꺼내본다.
스무 살, 대학에 갓 입학한 어느 봄날이었다.
새내기 환영회. 선배들은 술잔을 들며 물었다.
“진정한 친구란 뭔 거 같아?”
평상시 좋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던 선배의 질문 앞에서 은수는 괜히 진지해졌다. 그 질문을 아주 오래 생각해 왔던 것처럼.
“저는 죽기 직전에야 이 사람이 진정한 친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마음, 그런 게 우정 아닐까요.”
모두가 웃고 넘길 이야기였지만, 진지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은수였지만 사실 그 말이 전부였다.
그 시절의 그녀는 오글거릴 정도로 진지한 아이였다.
어딘가 느리고, 판단을 유보하는 성격.
“잘 모르겠다”는 말을 그땐 차마 하지 못했다.
진짜로 친구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짝꿍이었던 J. 체육대회 소풍날, 버스 안에서 은수가 컨디션이 좋지 않자 말없이 등을 주무르던 아이.
엄마에게 받아본 적 있었던가 생각이 들 정도로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때 처음 ‘우정’이라는 감정이 몸에 새겨졌다.
그 손길은 오래 기억될 거라고 그 아이와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약속 같은 건, 인생에서 가장 무의미한 형태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J는 아무 예고 없이 은수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난 더는 너랑 친구 하고 싶지 않아.
이유는 말하지 않을게.
널 좋아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선 아이의 뒷모습이 눈에 박혔다.
그 순간부터, 은수는 사람을 믿는 게 무서워졌다.
한동안 진짜 친구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관계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실제적으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그럼에도 스무 살의 은수는 끝끝내 ‘변치 않는 마음’이 우정이라고 믿고 싶었다.
진심이 변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문사書의 문이 열리고, 고양이 개츠비가 고개를 든다.
은수는 고요히 앉아
아주 오래전 미처 써 내려가지 못한 편지 한 줄을 노트에 적는다.
"J에게
그때 넌 나에게 베스트 프렌드였어
그때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마음은
지금도 내 안에 있어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있기를"
지금의 은수는 안다.
우정이란 끝까지 곁에 남는 사람만이 아니라
한 시절을 뜨겁게 지나가준 사람들도 포함된다는 것을.
그 시절 은수의 세계를 밝혀주었던 J에게는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때 넌, 나에게 정말 소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