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어제는 좋아 보였던 것도, 왠지 오늘은 틀려 보여.

by 온교

작년 가을 일이다. 서랍장 정리를 하다가 쓰다 만 노트 여섯 권을 발견했다. 죄다 앞 장이 뜯겨져 나간 노트들이었다. 하얀 노트는 종이를 뜯어내진 않았지만 지우개와 수정테이프로 내용이 전부 지워진 상태였고, 까만노트는 3분의 1 이상이 찢겨져 제본 실이 너덜너덜해 있었다. 분명 내 머릿속엔 새 노트가 두 권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나같이 앞이 찢겨진 중고 노트뿐이라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이 노트들이 '한 때' 나의 일기장이였음을 떠올렸다.




나에겐 (아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각한 고질병이 하나 있다. '삐뚤어진 글자를 지나치지 못하는 병'이다. 다들 처음 들어보시겠지만 이 병은 굉장히 위험한 병이다. 얼마나 치명적이냐면, 짧은 시간 내 많은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숫자를 휘갈겨도 모자른 수학 시험지에 반듯반듯 행과 열을 맞춰 식을 풀어내게 하고, 주관식을 잘 풀어놓고도 글씨가 삐뚤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게 만들었으니까. 당연히 OMR도 이 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 아니, 더 심했다.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동그라미에 정확하게, 한 치의 튀어나옴 없이 까맣게 칠해야 마음이 놓였다. 설령 맞게 푼 문제여도 OMR 마킹이 살짝 튀어나오거나 완벽한 동그라미로 칠해져 있지 않으면 오답처리가 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이 약도 없는 고질병 때문에 피해를 본 건 수 많은 노트들이다. 노트의 비닐을 뜯고, 고심하며 펜을 고르고,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여러번 되뇌어보고, 펜 촉이 종이에 닿기 직전까지 펜을 이리 잡았다 저리 잡았다, 손에 힘을 주었다 말았다 펜을 잡는 자세까지 고르고 나서야 비로소 한 글자씩 기록하지만, 이마저도 볼때마다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흠 없는 노트를 가지고 싶어 '새로 쓰자!'는 마음으로 앞 장을 뜯어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부터 너저분한 노트가 시작된다. (당연하지 네가 뜯었잖아) 그리곤 새 노트를 찾는다. 항상 이런 식이다. 약도 없다.그 중 일기장은 병이 가장 크게 도져있다. 감히 자잘한 메모장과 비교할 수가 없다. 또박또박 쓰여진 글자 말고도 내용, 문장, 생각, 느낌 등등 추상적인 부분까지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잘 써진 일기라 해도 내용이 맘에 들지 않으면, 내 생각이 유치하다 느껴지면 여지없이 뜯어버린다. 어느 날은 날씨 묘사가 상투적이라며 페이지를 구겨버렸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뜯고 처박은 일기장이 여섯 권. 가만히 보니 결국 남은 것은 지문 묻은 테이프 자국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종이다. 잘 쓰려고 그렇게 애쓴 결과가 이거다. 어쩌면 소중한 나의 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미완성 노트 여섯 권. 나는 뭘 그렇게 취소하고 싶었던 걸까. 인생에 취소 버튼이 없어 노트라고 찢고 싶었던 걸까. 취소하고 싶다고 취소되는 것도 아닌데.





괴발개발 뭐라도 썼더라면 흑역사 한 장이라도 남았을 터이다. 테이프 자국보단 흑역사가 훨씬 낫다. 결코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주지 않는 인생이라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처럼 글자가 삐뚤어지고, 잉크가 손에 묻어 번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써야한다. 가방 속에서 절반정도 사용한 오렌지색 로디아를 꺼냈다. 펼치자마자 지우고 싶은 글들이 수두룩하다. 손이 찢어버리기 전에 얼른 새 페이지로 넘겼다. 펜을 꺼내려 필통을 여는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펜으로 써야 글씨가 예쁘게 잘 써질까?' 라고 생각했다.

아아. 나, 과연 이 병 고칠 수 있을까.







*소제목은 김정연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 58화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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