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써전

by 온교

9시 예약이었는데 진료는 3분 늦게 시작됐다. 의사는 다른 날과 달리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잠시 잊고 있다가 그녀의 옷을 보고 이곳이 외과 병동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새벽 수술이 있었던 것일까. 아님 내 진료가 끝나고 새로운 수술에 들어가는 것일까. 안녕하세요. 피곤한 안색으로 나를 기다리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안색과 달리 크고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녀 뒤론 우수한 성적으로 펠로우쉽을 마쳤다는 금색의 베스트 펠로우 상장과 또 다른 상장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나로선 가늠조차 해볼 수 없는 써전Surgeon의 시간들. 빡세다는 단어가 야들야들 해보일 정도로 짙은 밀도 속에서 수련해왔겠지. 그 길고 어려운 수련 과정 속에는 며칠씩 밤을 새느라 힘들어도 환자 앞에선 활기차게 말하고 표정 짓는 법도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 나의 CT엔 큰 문제가 없었다. 긴장하느라 일자로 꼿꼿해진 내 허리가 괜찮습니다 라는 말 한 마디에 활처럼 휘자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 다른데 불편한 곳은 없나요? 나는 망설였다. 저... 이게 아픈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한 번 더 머뭇거리다 내 뒤로 길게 늘어진 대기줄을 떠올리며 얼른 말을 이어갔다. 앉았다 일어나거나 누웠다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다른 사람들도 이러나요? 통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어지러움과 함께 암전 상태가 되면 살짝 휘청거리게 되는데 이때마다 나는 시야가 환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했다. 예전과 달리 암전 상태는 점점 빈도가 잦아졌고 암전 시간 또한 길어졌다. 행여나 계단 같은 곳에서 넘어지거나 딱딱한 곳에 부닥치게 될까봐 걱정이 커져가던 참이었다.


기립성 저혈압이에요. 그녀는 듣자마자 증상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아 이걸 기립성 저혈압이라 하는군요. 막연히 앉았다 일어날 때 나를 성가시게 하는 무엇으로 부르다 이름을 알고 나니 마음이 폭 놓였다. 인간은 모르는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시험이든 적군이든 병이든 지피지기는 중요하니까.


그럼 약 먹으면 나아지나요? 내가 좀 전보다 환해진 얼굴로 질문하자 반대로 그녀의 얼굴은 조금 난처해졌다. 아니요. 특별한 약이 있는 건 아니에요. 생활할 때 천천히 일어나고 하체 근육 키우는 운동을 많이 하면 도움이 돼요. 아... 나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내심 여섯 글자로 딱 떨어지는 증상 이름처럼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는, 쉽고 간단한 답을 원했나보다. 얼른 표정을 수습하기 위해 아하하하 맹하게 웃었다.


초록색 수술복 차림의 그녀는 실없는 내 웃음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몇 초간 나를 응시하더니 처언-처언-히 일어나는 거만 신경 쓰면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상냥한 낯으로 나를 달래주었다. 어떤 논문이나 컨퍼런스를 통해 결코 배울 수 없는 선한 낯빛이었다. 수련 과정 중 그런 걸 배우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확한 진단과 탁월한 수술 실력 말고도 의사로서 가져야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고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환자를 향한 따뜻한 눈. 건강을 빌어주는 온기 어린 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10초 전에 얘기해준 주의사항을 까먹고 의자에서 휙 일어났음에도 전혀 시야가 어두워지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눈맞춤으로 그녀와 인사하고 병원을 나오는 동안 다 나은 기분마저 들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좋은 의사이며 이젠 상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베스트 써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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