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장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l Sep 06. 2020

8월의 거짓말

8월 한 달, 매일 한 거짓말을 모았다.

대개 아닌 척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8.1 인천에 있는 꽃가게에 가자는 여자친구의 제안에 좋다고 답했다. (결국 안 감)

8.2 낮잠은 15분도 채 안 잤는데 40~50분 잔 것처럼 말했다.

8.3 지난주 금요일 술값을 갚으란 말을 주말 동안 안읽씹한 지인이 아침에 돈을 갚자 쿨하게 기다린 척했다.

8.4 타 부서 팀장님이 기안서 내용이 담당 실장한테 사전 공유되었는지 물었는데 우리 실장님이 말했을 거라고 했다.

8.5 회사 이름으로 점심 식사 장소 예약하는데 예약받는 분이 회사 이름을 완전히 틀리게 들었는데도 그냥 맞다고 했다.

8.6 포장된 닭강정을 들고 갈 때 혼자 먹는 거 아닌 것처럼 꼬챙이를 두 개 챙겼다.

8.7 여름휴가 전날이라 매우 바쁘니까 쉴 시간도 없다고 주변에 광고했는데, 증권 계좌 뱅크샐러드에 연동하려고 업무 시간 30분 넘게 허비했다. (연동하지도 못함)

8.8 비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고속도로 빗길 운전하는 동안 조금 졸렸는데 졸리냐는 여자친구 물음에 끄떡없다고 했다. (졸진 않음)

8.9 부모님께 드릴 쌍화탕 조금 지어볼까 한약방 갔는데 30만 원을 부르길래 학생이라 돈 없다고 거짓말했다. 그랬더니 25만 원까지 해준다고 흥정하면서 강매할 것처럼 말하길래 도망치듯 나왔다. 한약방 할아버지는 읊조리듯이 미친놈들이라 했다.

8.10 회센터에서 회를 포장해 가려했는데 여자친구가 갑자기 소라 먹고 싶다길래 (나는 싫어하지만) 괜찮다고 했다. (한 점 예의상 먹음)

8.11 행담도 휴게소에서 에그몬 샌드위치 먹고 싶었는데 돼지로 볼까봐 과자 하나로 충분하다고 했다.

8.12 친구들이 대학 시절 내가 관심 가졌던 여자 동기 이야기로 놀리길래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내뺐다.

8.13 형이 모레 있을 가족 모임 식사를 나더러 사라고 말하길래 쿨한 척 알겠다고 했다. 무려 한우다. 다섯 명!

8.14 특별히 기억나는 거짓말은 없다. 안 했을 수도 있고.

8.15 고향 집 거실에는 에어컨이 없어 한증막 같았는데 엄마한테 견딜만하다고 했다. 사실 온몸이 끈적끈적.

8.16 친구 결혼식 날, 다른 친구와 식전에 부지런히 만나 있자고 약속했는데 입을 옷 고르다가 늦었다. 길 잃어서 늦었다고 했다.

8.17 여자친구에게 응암역부터 불광천을 따라 집까지 걸어갔다고 했지만, 사실은 응암역과 새절역 사이부터 걸었다.

8.18 짧은 머리가 유행이라 나만의 취향으로 짧게 잘랐는데, 왜 짧게 잘랐냐는 주변 사람의 물음에 비와이 닮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다. (주변에서 너무 놀려서…)

8.19 불과 한 시간 전에 통화했던 협력사 대리님을 못 알아봤는데 알아본 척했다. 연락 온 것처럼 휴대전화를 꺼내서 명함에 있는 사진과 대조해서 누군지 확인했다.

8.20 광고대행사 이사님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저녁 자리에서 오래 보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면 TV 광고를 중단한다고 말해야 한다.

8.21 대학 동기지만, 31살인 지금에서야 처음 대화해본 친구를 여행 중에 만났다. 술자리에서 배부르다고 말하며 안주를 뒤적거리는 그 친구를 보고 장난칠까 고민하면서 입을 씰룩대다 들켰다. 다른 안주 보고 있었다고 거짓말했다.

8.22 여행 숙소에서 안주 당번, 설거지 당번 정하려고 카드 뽑기를 했다. 뽑은 카드를 다 같이 한번에 뒤집는 거였으나 무의식으로 몰래 뒤집어봤다. 나는 안주 당번이었는데 안 본 척하고 카드 바꾸기 제안했다. 당번은 피했다.

8.23 여행에서 돌아온 날이라 많이 피곤했지만, 여자친구 집을 지나가던 길이라 안 피곤한 척 집에 잠깐 들른다고 말했다. 여자친구가 괜찮다고 집 가라는 말에 내 제안에 거절했단 것에 서운한 척 집으로 갔다.

8.24 주말 동안 여행에 다녀오느라 여자친구를 못 봐서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이나 내일 중에 볼까 고민하던 중에 여자친구가 심심하단 식으로 말해서 마치 오늘 보려고 했던 것처럼 행동했다.

8.25 친하게 지냈던 회사 동기와 노는 걸 그만하고 싶어서 다이어트와 금주한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하나도 안 미안했다.

8.26 특별한 일은 없었다.

8.27 8월 초에 조금 사뒀던 주식이 도통 오를 기미가 없어서 이틀 전에 팔았는데 웬걸 오늘 1만 원 가까이 올랐다. 지인이 말해주길래 너무 아쉬웠지만 배 안 아픈 척했다.

8.28 면접 보러 가는 친구가 힘을 달라고 했다. 면접 붙으면 살 빠질 거라고 응원했다. 붙어도 살은 안 빠질 거다 아마도.

8.29 오리로스구이를 둘이서 반 마리(400g) 시켜서 먹었다. 한 마리(800g) 먹기엔 너무 많긴 했는데 반 마리는 부족했다. 그렇지만 다 먹고 딱 적당하다고 말했다.

8.30 차 타고 가던 중 흘러나온 노래의 가수를 여자친구가 누군지 물어봤는데 잘 아는 척 설명했다. 사실 나도 안 지 일주일도 안 됐다.

8.31 요즘 조금 예민한 실장님이 시답잖은 걸로 역정을 내길래 죄송하다고 했다. 5분도 안 돼서 바로 사과하시길래 괜찮다고도 했다. 죄송하지도 괜찮지도 않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포천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