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이 넘은 아버지의 사모곡
우리 집은 할머니와 엄마의 종교가 달랐다. 신념의 문제는 본래 민감한 법이라, 두 분 사이에는 서로의 영역을 간섭하지 않기로 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교회에 가자고 강요하지 않았고, 효자였던 아버지는 할머니가 교회에 가실 때면 언제나 우리 중 한 명이 곁을 지키게 했다. 묘한 긴장과 존중이 공존하던 우리 집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매일 저녁, 할머니는 잠자리에 들기 전 마치 의식을 치르듯 커다란 성경책을 펴 들고 시조를 읊듯 읽으셨다. 간간이 옆에 누운 우리에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음성이 아련하다. 오선지 없는 찬송가 책을 보며 창(唱)처럼 구수한 가락으로 뽑아내던 노래, 그리고 이어지던 기도. 이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거창한 간구로 시작된 기도는 이내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의 이름 하나하나로 내려왔다.
막내 손자의 이름까지 모두 부르고 나서야 끝이 나던 길고 긴 축복. 그것은 종교를 넘어, 한 노인이 자신의 생을 다해 자손들의 앞날에 둘러주던 보이지 않는 울타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할머니는 교회에 가는 일을 잊으셨고, 방 안에서 흘러나오던 낮은 노래와 읊조림도 들리지 않았다. 기도가 멈춘 자리에는 낯선 침묵이 들어찼고, 할머니는 평생 지켜온 신념의 길마저 잊어갔다. 친정에 온 나를 알아보면서도, 곁에 선 내 남편과 아이들은 누구냐며 낯설게 물으셨다. 기억의 실타래가 엉키기 시작하자, 할머니가 평생 쌓아 올린 경건한 일상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아흔한 살, 화장실에 가려다 넘어진 사고로 할머니의 세상은 침대 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고령의 어머니에게 칼을 대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매일 곁에서 수발을 들며 그 고단함을 묵묵히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효도라고 여겼다. 수술을 반대했던 그 선택 속에서 엄마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작은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뼈가 부러진 노인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며 아버지와 엄마의 방식을 강하게 질책했다. 결국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수술대에 오르셨다.
그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는 지금도 가끔 이렇게 말씀하신다.
밥 먹이는 줄이 폐로 들어가는 바람에….
의사가 말한 ‘흡인성 폐렴’이라는 차가운 단어를, 아버지는 당신 어머니가 겪었을 마지막 고통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수술을 반대했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미련과, 자식으로서 끝내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자책이 뒤섞인 독백이었다.
요즘은 효율적인 시스템이 돌봄을 대신하지만, 그 시절에는 부모의 마지막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 결과까지 평생의 애석함으로 끌어안고 살아가곤 했다. 며느리와 종교가 달라도 묵묵히 자손들을 위해 기도를 쌓아 올렸던 할머니, 그리고 비전문적일지언정 끝까지 어머니를 품고 살려했던 아버지.
할머니의 기도 소리는 멈춘 지 오래다. 그러나 아흔이 넘은 아버지는 아직도 그 시간을 품고 산다.
이 글은 누군가를 그토록 지독하고 애틋하게 책임지려 했던 한 가족의, 뜨거웠던 사랑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