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맞았잖아, Gareth!

걸어 다니는 교과서도 틀릴 때가 있다

by 버티기





두꺼운 안경 너머로 늘 지적인 눈빛을 반짝이던 개러스(Gareth).


몸집은 묵직했고 걸음은 느릿했지만, 학원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걸어 다니는 역사 교과서’로 통했다.


움직임은 굼떴을지 몰라도 역사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그의 두뇌는 완전히 다른 속도로 돌아갔다. 사건의 맥락은 물론이고, 까다로운 연도까지 막힘없이 쏟아냈다.


한국 역사에 대해서도 그는 꽤 해박한 편이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그 미묘하고 뜨거운 감정선까지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느 날, 옆 반 강사가 문을 두드렸다.

학생들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확답을 얻으러 온 눈치였다.


“What's the oldest metal type in the world?”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가 뭐야?)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듯 답했다.


“Gutenberg, 1450.”



순간, 우리 반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Wait, that’s not true! It’s Jikji!”

(잠깐만요, 그거 아니에요. 직지라고요!)


우리는 직지가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우리 앞엔 '서구 중심의 역사관'이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서 있었다. 개러스와 동료 강사는 고개를 저으며 쐐기를 박았다.


“That’s what every textbook says.”

(모든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어.)


그 단호함 앞에서 우리의 ‘청주존심’은 사정없이 긁혔다.


청주는 직지의 도시다. 거리의 철제 가드에도, 발밑 맨홀 뚜껑에도 ‘直指’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흥덕사 절터에서 직지가 발견됐다고 해서 ‘흥덕구’라는 이름도 생겼다. 이 도시는, 조금 과장하자면 직지라는 자부심 위에 세워진 곳이다.


2000년대 초반. 스마트폰도, 구글 검색도 없던 시절이었다. 당장 증거를 찾아 그들의 코앞에 들이밀 수도 없었다.


우리의 진실은 그저 ‘애국심 섞인 한국인들의 주장’ 정도로 치부되고 말았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AI가 단 몇 초 만에 결론을 내린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그리고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 ‘직지’.


모두 한국의 유산이라고.


문득 생각한다. 지구 어딘가에서 백발이 되었을 ‘걸어 다니는 역사 교과서’ 개러스에게 다시 말해주고 싶다.


“Hey Gareth, now do you get it?

It’s not the Gutenberg Bible. It’s Jikji.”


그 시절 우리에게도

지금처럼 당당히 꺼내 들 수 있는 탄탄한 언어와,

주저 없이 내밀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글에 등장하는 ‘직지’의 정식 명칭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입니다. 1377년 고려 우왕 때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된 불경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입니다. 이는 서구 인쇄혁명의 상징인 구텐베르크 성서(1450년대)보다 무려 78년 앞선 기록입니다.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사진은 청주시금속활자전수교육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