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끝에서 만난 실존의 무게
어린 시절, 나는 하나뿐인 남동생을 부하 삼아 골목을 정복하러 다녔다. 담장 너머 들려오던 개 짖는 소리와 밥 짓는 냄새가 뒤섞인 그 구불구불한 골목들은 나의 영토였고, 나는 그 세계의 당당한 탐험가였다. 발길 닿는 대로 걷던 그 길은 매 순간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설렘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매끈하게 닦인 천변 산책로를 걷는다. 안전하고 효율적이지만, 때로는 무미건조한 길. 어느 날 문득 유년의 기억이 나를 이끌었다. 큰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 숲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곳. 개발의 손길이 비켜간 오래된 집들과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이다. 나는 다시 어린 마음으로 그 길의 결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그루의 거대한 팽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수백 년은 족히 버텼을 듯한 묵직한 기세. 거친 껍질에 손을 대자 응축된 시간이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잠시 그 나무에 몸을 기댔다.
"나무야, 나무야, 너는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생의 명멸을 지켜보았니. 그 고요하고 따스한 기운을 내게도 조금 나누어주렴."
그 순간, 정적을 깨는 개 짖는 소리가 골목길 저편에서 울렸다.
모퉁이를 돌자 실랑이를 벌이는 노부부가 보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할아버지는 흙투성이가 된 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젖어버린 바지는 그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생리적 비극을 말없이 드러냈고, 인근 병원 이름이 적힌 휠체어는 길가에 뒤집힌 짐짝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할머니는 "추운데 이러고 있을 거냐"며 악을 쓰며 모진 말을 쏟아냈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애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남편을 일으키려 애쓰는 그 눈빛에는 절망과 고단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오지랖을 따질 겨를도 없이 다가갔다. 나는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고정하고 발판을 접었다. 기력 없이 축 늘어진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한 인간이 평생을 짊어지고 온 시간의 무게, 삶의 하중이 고스란히 담긴 실존의 무게감이었다.
두 여자가 힘을 모아 겨우 그를 휠체어에 앉혔다. 나는 그들의 집까지 휠체어를 밀어 드렸다. 그러나 도착한 집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옛 시골집 특유의 높은 툇마루. 할머니의 다급한 호통 섞인 애원 속에 할아버지를 다시 마루 위로 밀어 올리고 나서야 나는 그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지만 낮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단순한 연민을 넘어, 내 미래를 미리 들여다본 듯한 근원적 공포였다. 언젠가 나 또한 그들처럼 어딘가에 주저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자각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까지 허물어질 수 있는가.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인문학적 명제는, 육체의 기능이 소멸해 가는 노년의 길목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오래전에 읽었던 스토아 철학자들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내면의 의지나 태도)과 통제할 수 없는 것(육체의 쇠락과 죽음)을 엄격히 구분하라 가르쳤다. 누군가는 존엄을 지키기 위해 생을 스스로 거두는 것을 '용기'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주어진 고통을 끝까지 견디는 것을 '인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골목에서 마주한 현실은 철학적 수사보다 훨씬 거칠고 처절했다. 인간이 끝까지 존엄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타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그 장면은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존엄이란 애초에 홀로 지켜내는 성채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곁에서 휠체어 바퀴를 고정해 주고 어깨를 내어주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공동의 가치가 아닐까. 완전한 자립이 아니라, 비참한 순간조차도 끝내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곧 존엄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제 구불구불한 골목은 더 이상 나의 놀이터가 아니다. 그곳은 내가 언젠가 도착할지 모를 시간의 끝자락을 미리 보여준 이정표이자, 남겨진 삶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져주는 사유의 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