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길은 대전광역시와 청주, 옥천, 보은에 걸쳐 호수를 껴안고 이어지는 약 200km의 거대한 둘레길이다. 청주에 터를 잡고 살다 보니, 문득 물결이 그리울 때 가장 먼저 마음이 닿는 곳도 바로 그 길이다. 해 질 녘, 호숫가 굽잇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은 내 삶의 작지만 확실한 기쁨 중 하나다.
길을 가다 보면 ‘한터’라고 적힌 소박한 표지판들이 눈에 띈다. 그 표지판을 따라 골목을 조금 들어가면 오롯이 호수와 마주할 수 있는 빈터가 나온다.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대전 쪽의 핫한 카페들도 좋지만, 나는 가끔 적막한 터에 차를 세우고 물가로 다가가는 시간을 사랑한다.
어느 겨울을 나고 봄의 기운이 막 고개를 들던 날이었다. 그날도 물가에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에 차를 대고 걷다 보니, 길 한쪽에 쌓인 연탄재 무더기와 마주쳤다. 인근 주민들의 겨울을 따스하게 데워주고 이제는 소임을 다해 버려진 존재들. 비스듬히 기우는 저녁 햇살은 다 타버린 연탄의 결을 보석보다 더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그 하얀 무더기를 보고 있자니, 연탄이 지나온 모든 사연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깊은 산속 탄광에서 얼굴에 검댕을 묻힌 광부들이 채취한 광맥, 덤프트럭에 실려 기나긴 여정 끝에 도착한 연탄공장. 그곳에서 뜨거운 압축을 견디며 비로소 단단하고 매끈한 검은 모습으로 태어났을 연탄들.
까만 연탄이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설렜을까. 어떤 곳으로 가게 될지 얼마나 애가 탔을까. 저마다 더 좋은 곳에 쓰이기를 바라며 경쟁을 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집이나 일터 창고에 귀하게 보관되어 있으면서, 그들은 스스로가 ‘쓸모 있는 존재’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마침내 아궁이의 부름을 받아 귀한 자리에 올랐을 때, 연탄은 최선을 다해 제 존재를 불살랐을 것이다. 바로 밑에서 훨훨 타오르는 연탄의 온기를 건네받으며, 새카만 가슴을 졸이던 연탄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으리라. 아래에 있는 연탄이 하얗게 자기를 비우며 생을 넘겨주듯, 그 또한 다음 연탄에게 제 모든 온기를 전해주고 조용히 제 몫을 다했을 것이다.
자신을 살라 주변을 따스하게 하는 그 ‘쓸모’의 순간은, 어쩌면 광산부터 창고에 이르기까지 그 긴 기다림에 비하면 너무도 순식간이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그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저 연탄재들에게 마음이 있다면, 지금 지는 석양 아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제 몸을 다 태워 남을 데웠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낄까, 아니면 다 비워낸 해방감에 속이 시원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허탈해하고 있을까.
석양을 품고 하얗게 반짝이는 연탄 무더기를 바라보며 오늘의 호수 산책을 마친다.
소멸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 그 뜨거운 쓸모의 흔적을 가슴에 새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씁쓸함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