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성별 선택란이 스크롤로 이어질 때

by 버티기





나이키 아웃렛 매장에서 옷 몇 가지를 고르다 멈칫했다. 앱에 가입하면 할인을 해준다는 말에 서둘러 회원가입 창을 열었을 때였다.


성별 선택란이 두 개가 아니었다.


스크롤을 내려야 할 만큼 길게 이어진 성별 목록 앞에서 나는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배운 생물학의 세계에서는 성별이란 남자와 여자, 두 가지뿐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리스트는 마치 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알던 세상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순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애슐리.


활기차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녀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남자만큼 짧은 머리,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얼굴 곳곳의 피어싱.


귀와 입술, 코, 눈썹까지 이어진 금속 장식은 당시 우리에게 파격을 넘어 조금 기괴하게 느껴질 만큼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런 시선을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피어싱이 아프지 않냐는 우리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입을 벌렸다. 그리고 뱀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제각각 움직여 였다.


놀라는 우리를 보고 그녀는 씩 웃었다.


멀쩡한 혀를 자르면서까지 그녀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애슐리는 자기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정체성 때문에 얼마나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냈는지.


특히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렸고 목소리도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The hardest part was that my parents couldn't accept me for who I am. It felt like my home was the loneliest place on earth.”


가장 힘들었던 건 부모님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집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장소처럼 느껴졌다는 말이었다.


애슐리는 마치 그것이 자기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성 정체성의 암호’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곤 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보던 텔레토비의 보라색 캐릭터도 단순한 어린이 프로그램의 캐릭터가 아니라고 했다. 빨간 핸드백과 보라색 몸, 그리고 그들이 흔드는 무지개는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지 않는 상징이라고.


그녀에게 무지개는 단순히 예쁜 색의 나열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정서에서 무지개가 보통 ‘좋은 징조’나 ‘희망’을 의미한다면, 그녀에게 그것은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신호였다.


보라색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게는 어딘가 고귀하고 신비로운 색이었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또 다른 정체성을 가리키는 언어였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I don't want to be defined by others.”

(나는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싶지 않아.)


이십 년이 흐른 지금, 그 문장은 뜻밖에도 나이키 앱의 가입 화면에서 다시 나를 찾아왔다.


한때는 먼 나라에서 온 원어민 강사의 독특한 정체성처럼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글로벌 브랜드의 시스템 속에 ‘상식과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여전히 그들의 관점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모든 다름을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이키 매장에서 그 긴 리스트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내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동의'나 '이해’가 아니라 어쩌면 ‘인정’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믿어온 세상 바깥에도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수많은 색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


애슐리가 오래전에 보냈던 무지개색 신호는 아주 느린 속도로 나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조용히 묻고 있었다.


당신이 알던 세상 너머의 색깔들을,

이제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