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회화', 마가렛을 기억하며
서귀포 중앙로터리를 지날 때마다 유독 시선을 붙드는 간판이 하나 있었다.
‘미인화화(美人話話)’. 이름만으로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곳이 영어 학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제주라는 낯선 곳에 머문 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제주라는 섬의 속도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무렵, 문득 잊고 싶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석사 졸업 시험을 앞두고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 서적을 붙들고 씨름하던 밤들. 우리말 번역본을 읽어도 난해하기만 했던 그 텍스트들은 내게 거대한 벽이었다. 영어가 발목을 잡았고, 자칫하면 졸업 탈락이라는 벼랑 끝으로 몰릴 뻔했던 순간들. 간신히 학위는 손에 쥐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영어에 대한 깊은 패배감과 콤플렉스를 내 영혼에 새겨놓았다.
‘그래, 시간도 있고 학원도 가깝잖아. 이번에야말로.’
비장한 마음으로 자기소개 문장 몇 개를 달달 외워 학원 문을 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레벨 테스트나 팽팽한 긴장감은 없었다. 학생은 네다섯 명 남짓, 클래스도 몇 개뿐인 소박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마가렛을 만났다. 쉰 살쯤 되어 보이는 키 큰 미국인 여성. 보스턴 출신의 변호사였다는 그녀는 다행히 아주 쉽고 친절한 말투로 수업을 이끌었다. 강의실에는 나 말고도 제주의 호텔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몇 있었다. 현장에서 외국인 손님들을 직접 응대해야 하는 그들에게도 영어는 절실한 생존의 언어였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수업에 참여하던 그들은 마가렛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어쩌다 보니 내가 중간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한국어로 대략적인 뜻을 전해주면, 그제야 동료 학생들은 문법과 상관없이 더듬더듬 진심을 담은 단어들을 내뱉었다. 진도는 느렸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학원으로 걸어가는 길 '오늘은 이 표현 하나만은 꼭 써먹고 오자.'라고 다짐하며 입술을 달싹이던 설렘이 좋았다.
시간이 흐르자 학생들은 하나둘 떠났고, 어떤 날은 마가렛과 나 둘만 남아 수업을 하게 되었다. 수업은 점차 교실을 벗어났다. 그녀는 나를 집으로 초대해 서양식 요리를 가르쳐주었고, 한국 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내가 영어로 대답하지 못해 머뭇거리면, 그녀는 마치 내 눈 속으로 들어올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입 밖으로 내뱉어봐.
내가 다 알아듣고 고쳐줄 테니까.
그 다정한 격려 덕분에 나도 용기를 냈다. 그녀를 우리 집으로 초대해 한국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고,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적한 계곡으로 피크닉을 가기도 했다. 그녀가 정성껏 싸 온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며, 우리는 흐르는 물소리를 배경 삼아 어설픈 영어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논문과 시험이라는 압박 속에서 나를 괴롭혔던 영어가, 어느새 소통을 위한 따뜻한 도구가 되어 있었다.
마가렛이 한국을 떠나던 날, 그녀는 주소 하나를 적어주며 말했다.
“We can keep in touch with each other.”
그 말처럼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소식을 나누었다. 때로는 남미의 어느 도시에서 그녀의 안부가 도착하기도 했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나는 영어 회화 학원을 계속 다니게 되었다. 지역이 바뀌어도 영어 회화 학원을 먼저 찾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해 말하면 결국 닿는다는 것을 그녀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잦은 이사 탓인지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다. 하지만 마가렛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은 아지랑이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다.
좋은 관계는 때로 사람에게 뜻밖의 용기를 건네준다는 걸, 그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