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에 맺힌 눈물, 우리가 사람을 밀어내는 방식
마가렛이 떠난 후, 캐나다에서 이십 대 후반의 헤더(Heather)가 왔다. 그녀는 보라색에 가까운 신비한 눈동자를 가졌고, 걸음걸이도 말투도 유난히 느릿느릿했다.
보통 느리게 말하면 알아듣기 쉬울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녀의 영어는 난이도가 훨씬 높았다. 우리는 언어를 인식할 때 한 마디 한 마디를 분석하기보다 뭉텅이로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헤더의 언어는 단어와 단어 사이, 혹은 감정의 결을 따라 중간중간 멈춤(pause)이 있었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 차라리 시(詩)에 가까웠다.
헤더의 수업은 늘 고요했다.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그녀의 추상적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수업은 흐르기보다 자주 멈칫거렸다.
그 느릿한 진행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아니면 단어 사이의 그 고요한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했던 걸까. 누군가 학원 측에 불평을 제기했고, 다음 날 헤더는 보라색 눈에 눈물이 글썽한 채 우리에게 말했다.
One of my students
complained about me
to the director,
and it really broke my heart.
심장이 부서질 듯 아파하는 그녀를 토닥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타인의 '다름'에 대해 얼마나 좁은 허용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타지에서 온 젊은 헤더에게 그 불평은 단순한 강의 만족도에 대한 피드백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거절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서귀포는 외국인이 드물던 시절이었다. 길을 지나는 외국인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그들은 '무례하다(Rude)'며 거부감을 느꼈고,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겪는 차별에 민감해하며 "Are you a racist?"라는 말을 무기처럼 쓰기도 했다. 정작 우리 곁에 온 이방인의 서툰 호흡에는 인색하면서 말이다.
결국 헤더는 그 짧은 인연을 뒤로하고 떠났다.
우리는 누군가의 무례함에는 '인종차별'이라는 날 선 단어로 맞서면서도, 정작 우리 곁에 온 이방인의 느린 호흡에는 '비효율'이라는 편견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무례와 편견 사이, 그 좁은 틈에서 헤더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너무도 젊었고 상처받아 아파했던 헤더에게 그때 전하지 못한 말을 이제야 마음속으로 건네본다. 당신의 느린 언어는 틀린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리듬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