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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숙 Oct 27. 2022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강화에 있었다고?

강화 갑곶리의 ‘통제영학당’

연미정에서 갑곶돈대를 향해 길을 걷습니다. 8월 초순의 한낮은 뜨겁기가 한량없습니다. 이런 날에는 그늘이 좋은 숲속 길을 걷는 게 제격이지만 ‘해운사’를 들러볼 생각에 아스팔트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해운사는 강화대교 근처에 있는 작은 절입니다. 현재는 작고 한적한 절이지만 조선시대에는 50명 가까이 승군(僧軍)들이 있었고 이름도 '진해사'였습니다. 절이라면 수행승들이 있는 게 마땅한데 해운사에는 승군들에 대한 기록만 있습니다. 그것은 해운사의 특수성 때문일 것 같습니다. 진해사의 승군들은 해안 방어 및 성곽을 쌓는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해운사 전경



갑곶진 근처에 있던 진해사지금의 해운사


해운사의 과거 이름은 진해사입니다. 진해사는 금위영(禁衛營)이 있던 갑곶진 근처에 있었습니다. 금위영은 조선 후기에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군영입니다. 금위영의 대장인 민종도(閔宗道)는 숙종의 윤허를 받아 진해사 근처에 창고를 짓고 본영의 군수물자와 병조(兵曺)의 은자(銀子) 3만냥, 목면 5백동 등을 보관하여 승군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습니다. 


군수물자를 보관하던 창고는 병인양요 때 불 타 없어졌습니다. 그 후 진해사 역시 화재로 소실되어 빈 터만 남았습니다. 1960년경에 새로 건물을 짓고 '해운사'라는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강화도는 '역사의 섬'이란 이름에 걸맞게 어디를 가도 역사적인 사연이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절에도 이렇게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해운사를 둘러보고 갑곶돈대를 향해 갑니다. 강화해협을 가로 질러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구강화대교와 신강화대교입니다. 두 개의 강화대교는 ‘갑곶나루’가 있던 곳에 세운 다리입니다. 과거에 강화로 들어오자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때 강화에는 갑곶나루를 비롯해서 선두포나루, 정포나루, 인화나루 등 20여 개의 나루가 있었습니다. 그중 갑곶나루는 한양으로 오갈 때 이용하던 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가장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갑곶나루', '진해루'와 산허리를 따라 '강화외성'이 보입니다.



갑곶나루와 강화대교


갑곶나루는 한양으로 오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지만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강이나 바다를 통해 물자의 이동이 빈번했습니다. 서해 바닷길을 타고 온 배들은 강화해협을 거쳐 한강으로 접어듭니다. 말하자면 한양으로 들어가는 목구멍과도 같은 곳이 바로 강화해협이었고 갑곶나루였습니다. 그래서 강화도에는 해안을 방비하는 돈대들과 보, 진 등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갑곶나루 근처에는 갑곶진과 갑곶돈대 그리고 진해루와 금위영 등이 있어 오가는 배와 사람들을 감찰했습니다.


1890년대 당시 조선은 여러모로 낙후되고 뒤떨어진 나라였습니다. 군사력 역시 매우 보잘 것 없었습니다. 정규군인 상비군이 있었지만 문서에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무기도 변변찮았습니다.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1892년에 고종은 우리 해안을 지킬 해군 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해군 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지금의 해군사관학교격인 교육기관을 세웠습니다. 갑곶나루와 갑곶진 근처에 있던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종은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왕실의 비자금으로 증기선을 구입하기 위해 영국, 독일, 일본 등과 여러 차례 교섭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유길준, 박영효 등의 개화사상가들은 "개항장에 수영(水營)을 설치하고 외국 교관을 초빙하여 군사를 철저히 훈련시켜야만 바다를 견고히 막을 수 있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이 설립되었습니다.


 50명의 생도와 300명의 수병들이 '통제영학당'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근대식 해군사관학교통제영학당


1893년 2월 고종은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고, 뒤이어 3월 22일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을 위한 근대적 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 설립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같은 해 5월 군사적 요충지인 강화도 갑곶나루 근처에 학교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9월에 18세에서 26세 사이의 양반 자제 50명을 교육생으로 뽑고 또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수병 300여 명을 모집하여 통제영학교의 문을 정식으로 열었습니다. 교육생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파견된 군사교관인 콜웰(W. H. Callwell) 대위에게 영어, 군사학과 항해학 등의 기초군사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조교인 커티스(J. W. Curtis)하사로부터 포술학을 배웠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해군력은 동아시아 최강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은 세계 전사에도 길이 남을 큰 승리였습니다. 고작 12척의 배로 적함 130여 척을 상대해서 이겼으니 이보다 더 대단한 해전(海戰)은 역사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의 수군은 이렇게 강했지만 그로부터 300년 뒤 우리 해안을 지킬 해군력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변변한 전함 한 척 없었고 군사 체제 역시 전근대적이었습니다.


통제영학당은 수업을 위한 본관 구역과 생활공간인 기숙사 구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본관 구역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사당(敎師堂)은 기와를 얹은 10m 내외의 길쭉한 형태의 건물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있었던 기숙사 구역은 다시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갑호 생도의 기숙사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를 가르치던 영경교당(英經敎堂)이었습니다.


해군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시작했지만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우리나라의 군대가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통제영학당은 일본의 압력과 방해로 인해 이듬해인 1894년 11월에 폐교 되었습니다. 이후 나라가 망하면서 통제영학당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빈 터만 남게 되었습니다.


 '통제영학당 터'



자주국방의 염원우리 해안을 우리 힘으로


당시의 통제영학당을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을 통해 본 통제영학당은 당당하고 우뚝합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던 생도들과 수병들은 특별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왕명으로 세운 학교이니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일 년여 만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통제영학당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본관 건물도 또 두 동의 기숙사도 흔적 하나 없습니다. 산천(山川)만이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킬 뿐 그때의 영욕은 세월과 함께 지워져 버렸습니다. 다리가 놓이면서 나루의 역할도 끝났습니다. 인파로 들끓던 갑곶나루는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졌습니다. 자주국방의 염원을 품고 세웠던 통제영학당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해방 후 경남 진해에 해군사관학교가 생겼습니다. 비로소 우리의 해안을 우리 힘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군은 우리나라의 바다를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과 해양수호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1999년 6월 강화군청에 통제영학당 터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요청했습니다. 통제영학당 터는 2001년 4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해군은 '통제영학당'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 조상들의 조국 수호 정신을 기렸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지쳐가는 한여름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몸도 마음도 다 힘든 시절입니다. 이럴 때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요? 


100여 년 전 그때를 상상하면서 갑곶나루를 찾아봅니다. 통제영학당 옛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2009년 4월 13일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은 통제영학당 옛터에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개화〉와 〈쇄국〉의 혼란스런 시대 상황을 겪으며 오로지 조국의 바다를 지킬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인〈통제영학당>이 이 터에 뿌리내렸다. 바야흐로 빛나는 대한민국해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여기 표지석을 세운다. 2009년 4월 13일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강화대교로 차들이 바쁘게 오갑니다. 다리 아래 바닷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유하게 흘러갑니다. 통제영학당 터에 서니 당시 교육생들의 기상이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그때를 떠올려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오히려 그 '없음'이 더 절실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통제영학당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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