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보고
100살이라니, 도대체 감이 오지 않습니다. 기대 수명이 12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기대' 일 뿐 100살까지 살기도 쉽지 않은데, 여기 이 할배는 100살이랍니다. 요양원 침상에 누워 식물처럼 연명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리에 힘이 없어 걸을 때 약간 비척대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는 현역처럼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알란 칼슨’, 오늘은 그의 백 번째 생일입니다. 양로원에서는 그를 자랑거리로 내세울 참인지 한창 알란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높은 사람들도 오고 신문기자도 옵니다. 하지만 알란 칼슨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해야 하고 밤 11시가 되면 텔레비전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술도 한잔할 수 없는 양로원은 그에게 감옥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탈출합니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 양로원 창문을 넘어 ‘세상’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100세 생일날 도망친 할아버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인구가 1,000만 명도 되지 않는 스웨덴에서 120만 부 이상 팔리는 신기록을 세운 책입니다. 2009년 처음 출간된 이래 41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13년 7월에 초판 발매되었습니다. 이 책은 또 영화로 만들어져 절찬리에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할배가 전 세계를 누비며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한다니, 실로 대단한 활약입니다.
어릴 때부터 폭약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던 알란은 크고 작은 사고를 칩니다. 폭약으로 실험을 하다 창고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식료품점 주인을 죽게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 정신병원을 나왔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따로 길을 마련해주었으니, 우연히 스페인내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폭약을 다룰 줄 알던 그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고 그러다 스페인 프랑코 총통의 목숨을 구합니다. 여차저차 그는 미국의 핵폭탄 개발에도 끼어들게 되었고, 트루먼 대통령과도 조우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100년 동안의 인생길에는 계속 ‘우연’이 끼어들고,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함께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과 만나는 행운도 얻습니다.
알란이 걸어간 길에는 한반도도 포함됩니다. 미국과 소련의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던 그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었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한창 전쟁 중이던 한반도에 들어섭니다. 그는 김일성을 만났지만, 거짓말을 한 게 탄로가 나서 처형의 위기에 처합니다. 물론 항상 운이 따르는 사람답게 모택동이 등장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알란은 풀려납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자
이 부분에서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전 세계의 독자들은 한반도와 김일성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우리나라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게 해준 점은 고맙지만, 김일성을 우스갯거리로 그린 부분에서는 약간의 노여움도 들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비록 우리와는 등을 돌리고 지내는 사이지만 그래도 그는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내 형제인 김일성을 우스갯감으로 그린 부분을 볼 때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삶의 철칙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그는 순간에 닥친 일을 해결할 뿐입니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고,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그는 언제나 현재만 생각하지 과거나 미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올 일은 오게 마련이고,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지금 눈앞에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그의 이런 점은 한 번뿐인 인생을 잘 살자(you only live once)는 의미의 ‘욜로(YOLO)’와 부합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욜로’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이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습니다. 지나간 것에 연연해하며 괴로워하거나 아니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전전긍긍합니다. 물론 눈앞의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현재에 충실한 알란에게서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삶 역시 역사의 한 부분...
이 영화를 보다가 보면 톰 행크스가 주연한 <포레스트 검프>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알란의 인생 여정에 세계사가 날줄과 씨줄로 엮여 있는 것처럼 ‘포레스트’의 삶에도 미국의 현대사가 함께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나라 영화인 <국제시장>도 연상됩니다.
<국제시장>의 주인공인 덕수의 삶 역시 파란만장(波瀾萬丈)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아비규환의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독일의 탄광에서 석탄도 캤습니다. 또 월남전에도 참전했으며 1983년의 이산가족 상봉까지, 덕수의 삶에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가로 세로로 엮여 있습니다.
'알란'처럼 굵직굵직한 역사의 현장에서 세계사를 움직인 주역들과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덕수 역시 한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 온 사람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각 개인의 삶은 모두 역사의 한 장이며 한 시대를 증언합니다. 덕수는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삶을 그립니다.
알란은 100세 생일에 요양원의 창문을 넘어 다시 세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태양이 눈 부시게 빛나는 발리 섬의 해변을 친구들과 함께 거닙니다. 그가 편히 사는 것에 취해서 요양원 안에서 세상을 구경만 했다면 얻지 못했을 삶입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창문은 무엇인지, 혹여 우리는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넘어설 엄두는 못 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알란의 삶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죽음이라는 생의 마침표가 찾아왔겠지요. ‘죽음’이라는 문을 알란은 어떻게 열었을까요.
현재에 충실했던 알란이었으니 죽음마저도 가볍게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그 너머를 생각하며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 역시 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걸어갔을 죽음 그 뒤의 삶이 궁금해집니다.
영화 정보
원제 : The 100 year old man who climbed out the window and disappeared
감독 : 플렉스 할그렌
출연 : 로버트 구스타프슨, 이와 위클란드 등
수상내역 :
2014, 37회 밀 밸리 영화제(월드시네마 인디 - 은상)
18회 판타지아 영화제(관객상-베스트 국제영화(동))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