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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숙 Sep 17. 2021

송홧가루 가득한 봄날, 불령사를 가다

경북 청도 불령사 전탑

  “불령사에 가봐야 볼 것도 없는데...”


  별 볼 것도 없는데 뭐하러 절에 가려고 하느냐며 동생이 시큰둥해했다. 절이 작고 초라해서 실망할 거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식전 댓바람부터 절에 가자는 내가 이상했는지 쳐다봤다. 하기야 이상할 것이다. 볼거리가 많은 큰 절을 놔두고 별 볼 것도 없는 작은 절을 가보고 싶다고 하니 동생이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살고 있는 나는 어쩌다 한 번 고향 나들이를 하게 되면 가보고 싶은 곳을 미리 생각해 온다. 멀리서 왔는데 최대한 많이 보고 가려는 욕심에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는 경우도 있다. 그런 누나를 위해 동생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길 안내를 자청한다.


송화 가루 날리던 춘삼월 한낮


  동생은 이왕이면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별 볼 것도 없는 작은 절에 가자고 하니 왜 그러는지 의아해 했다. 동생에게는 불령사가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특별한 절이다. 그러니 작아도 괜찮고 볼거리가 없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우리 동네 앞에는 얼마의 논과 밭이 있는 들이 있고, 그 너머에 작은 산이 있다. 마을 앞에 있다고 앞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 뒤에 또 산이 있다. 그 산 속에 절이 있었다. 불령사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다들 ‘중사이 절’이라고 불렀다. 산 속에 ‘중산리’라는 작은 동네가 있는데, 그 동네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불령사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용산리에 있다. 용산리에는 삭깔, 새각단, 중산, 삭고개, 이렇게 네 개의 동네가 있다. 삭깔은 들을 앞에 두고 있어서 제법 동네가 컸지만, 그 외 중산이나 삭고개는 산 속에 있어서 어디쯤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깊은 산 속에 불령사도 함께 있었다.


  대구에서 경북 청도를 향해 달린다. 경산시 자인면을 지나 청도군의 금천면으로 접어들었다. 내 마음은 벌써 고향집에 다 온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동곡리를 지나 재를 넘으니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 고향 매전면이다. 여기서부터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다. 중학교 다닐 때, 삼 년 내내 콩나물시루 같던 버스를 타고 오갔던 길이기도 하고, 때로는 버스 차비로 산 과자를 먹으면서 친구들이랑 집까지 걸어서 가기도 했던 길이다. 


  ‘무심디미’를 지난다. 까마득한 벼랑 아래 강이 흐른다.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 무심디미의 깊은 강은 두렵기만 했다. 어른이 되어서 본 무심디미는 덤덤했지만, 강물은 예나 다름없이 검푸르기만 했다. 살구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던 북지 동네도 지났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용산동이 나온다. 불령사가 있는 바로 그 동네다. 



 

 용산동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길 오른편으로 보이는 산 밑에는 복숭아밭이 제법 있다. 꽃이 필 때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산을 바라보는데 저 멀리 있는 소나무 숲에서 노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치 황사라도 온 듯 사방이 누렇다. 송화 가루다. 불령사가 뭐 볼 게 있다고 가려고 하느냐며 시큰둥해 했던 동생이 차창을 열고 코를 벌름댄다. 팔을 바깥으로 내밀어 휘젓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면 송화 가루를 만질 수 있기라도 한 양 동생은 팔을 휘저으며 코를 벌름댔다. 


  용산동을 지나 산으로 들어선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시멘트 포장길이 산 중턱을 향해 가파르게 뻗어 있다. 길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다. 산은 품고 있던 물을 끊임없이 내보내는지 계곡에는 물소리가 세차다. 그 물은 그냥 흘러가지 않고 크고 작은 폭포들을 만든다. 바위를 만나면 둘러서 가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냥 냅다 쏟아져 내린다. 불령사 앞 계곡에는 자잘한 폭포들이 수도 없이 많다. 


동짓날 오후의 불령사


  가파른 산비탈 한 쪽에 절이 붙어 있다. 건물이 들어설 자리도 별반 없을 듯 한데도 용케 절이 들어섰다. 갈지 자 형태로 구불구불 비탈을 올라가며 몇 개인가의 전각이 들어서 있다. 


  아, 40년도 더 전의 초겨울 어느 날로 나는 들어간다. 그때도 지금처럼 계곡은 깊었고 물은 급하게 흘러 내렸다. 오후의 햇살이 따스하게 비춰주던 좁은 절 마당에 어머니가 서 계셨다. 어머니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음을 띠며 나를 반겨주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다니러 갔다. 그 날도 토요일이라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게 불령사에 가서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시키셨다. 평소에 절에 다니지 않던 어머니였는데 불령사에는 왜 가신 걸까. 


  우리 집에서 불령사까지는 걸어서 근 한 시간이 걸린다. 집에서 절이 있는 산이 빤히 보이지만 보기보다는 먼 길이었다. 절까지 가자면 인적이 없는 산 밑의 저수지도 지나야 했고, 그러고도 산길을 삼십 분 쯤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나는 저수지가 무서웠다. 검푸른 물이 가득 차있는 저수지는 왠지 사람을 홀릴 것 같았고, 바라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더구나 옛날에 누가 빠져 죽었네 하는, 좋지 않은 소문들까지 전해 내려오는 터여서 한낮에도 음습한 기운이 돌았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대로 불령사로 올라갔다. 저수지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가팔랐고 물소리는 세찼다. 저만치 절이 보이자 단숨에 뛰어갔다. 오르막길을 걸어오느라 숨이 찼지만 발보다 마음이 먼저 앞섰다. 


  법당에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인근 동네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그 분들은 어머니를 마중 온 나를 보고 기특해 하셨다. 두 분 계셨던 비구니 스님들도 칭찬하셨다. 딸이 칭찬을 받자 기분이 좋으셨는지 어머니의 온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어머니는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가신 적이 없었다. 법문을 외거나 그런 적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머니의 신심(信心)을 의심하지 않았다. 탁발을 오신 스님을 어머니는 깊이 공경했고 쌀독에서 한 쪽박 가득 쌀을 떠서 바랑에 부어드렸다. 스님도 어머니도 특별한 말씀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목탁과 염불 소리에 천만 마디 말씀이 다 들어있는 듯했다. 돌아서는 스님을 향해 깊이 절을 올리는 어머니를 보며 우리 역시 마음으로 절을 하고는 했다. 


원효대사가 세운 절


  그런 어머니가 절에 가셨다. 동지(冬至) 전날 올라가서 밤새 불공을 드린 어머니는 절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온 얼굴이 다 환했다. 밤을 새며 같이 불공을 올린 다른 아주머니들의 얼굴에도 환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날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 모녀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어머니의 환한 얼굴만이 떠오른다. 온 마음을 다해 나를 맞아주셨던 그 따뜻함이 어제 일인 양 그려진다. 그때 어머니는 원만했고 가득했다. 몇 해 뒤에 찾아올 병마의 고통은 어머니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불령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서기 645년경에 세웠으니 천 삼백 년도 더 되었다. 보기에는 작은 절이지만 보물도 한 점 지니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94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삼층탑이 바로 그것이다. 


  계곡 위의 가파른 바위 언덕에 탑이 하나 서 있다. 겉보기로는 보통의 탑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생긴 3층탑이다. 하지만 이 탑은 무늬가 있는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벽돌 한 장에 다섯 분의 불상과 3기의 탑이 돋을새김 형식으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형식의 탑은 우리나라에서 불령사 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돌이 흔하다 보니 탑도 대개 돌로 쌓은 것이 많다. 중국은 벽돌로 쌓은 전탑이 많고 일본의 경우에는 나무로 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대부분 돌로 탑을 만들었다. 불령사 탑처럼 벽돌을 층층이 올려 쌓은 전탑은 흔치 않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전탑은 안동의 신세동칠층전탑과 동부동오층탑을 비롯해서 전국에 5기뿐이다.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전탑은 석탑에 비해 공정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 수가 많지 않다고 한다. 또 보존에도 약해서 한 번 허물어지면 다시 쌓기 역시 쉽지 않다. 


  불령사의 탑도 여러 번 중수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허물어진 것을 조선 중기에 다시 쌓았고, 근세에도 두 번이나 복원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한 일들 속에서 벽돌들이 많이 없어졌고, 탑의 규모 역시 작아졌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탑은 또 허물어졌다. 그랬던 것을 1968년에 다시 쌓았지만, 원래 3층이었던 탑을 5층으로 쌓는 실수를 범했다. 그 후 2009년에 원형에 가깝게 다시 복원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은 천연의 바위 절벽 위에 우뚝 서있다. 깎아지른 듯한 암반 자체가 이미 탑이다. 그 위에 다시 쌓아 올렸으니 아래에서 바라보자면 까마득하게 높다.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의 불심이 저렇게 높은 암반 위에 탑을 앉힌 것이리라. 




불상과 탑 무늬가 있는 벽돌


  불령사가 있는 매전면에는 신라 시대에 세워진 절이 하나 더 있다. 동서 쌍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연사가 바로 그 절이다. 지금은 탑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꽤 큰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장연사에서 만든 벽돌로 불령사 탑을 쌓았다고 한다. 신심이 깊은 신도들이 그 벽돌을 불령사까가지 날라서 탑을 세웠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같은 면 안에 있지만, 두 절은 서로 오가기가 쉽지 않다. 큰 강을 하나 건너야 하고 작은 개울도 여럿 건너야 한다. 더구나 벽돌까지 이고 진 채 그 먼 길을 걸어야 했으니, 불심(佛心)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불령사의 탑은 천 사람의 손과 만 사람의 마음이 모아져서 세워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탑의 벽돌들에는 불상과 탑 문양이 돋을새김으로 들어 있고 불상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다. 벽돌 한 장 한 장마다 여러 기의 불상과 탑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이 삼층탑에는 도대체 몇 분의 부처님이 계신 걸까.


  우리나라에는 천불천탑의 신앙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많은 부처님이 계셨으며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천불천탑의 신앙이다. 불령사 전탑의 벽돌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불상과 탑은 바로 이러한 생각들을 담은 것이 아닐까. 힘들고 고생스러운 이생에서의 삶을 넘어 극락왕생을 꿈꾸었을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 이 전탑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천불(千佛)이 계신 탑을 보고 내려오니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개 두 마리가 낯선 사람을 보고 컹컹 짖는다. 두어 번 짖던 개는 곧 잠잠해지더니 우리를 따라오며 반긴다. 불심은 개들에게도 스며들었는지 절집의 개들은 다 순하기가 한량없다. 별 볼 것도 없는 절에 뭐 하러 가려고 하느냐고 하던 동생도 잠잠히 절을 둘러본다. 이제 불령사는 동생에게도 특별한 절이 될 것이다. 삼십 년도 더 전에 떠난 어머니의 자취가 남아 있는 절이니 어찌 특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에 올라온 나를 환하게 반겨주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니 가슴이 따뜻하다. 어머니에게 잘 해 드린 게 없어 안타까웠는데, 그때 일을 떠올리니 나도 잘 한 게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가신 어머니를 본 적은 한 번밖에 없지만, 어머니는 분명 극락왕생하셨을 것 같다. 


  세차게 흘러내리는 폭포를 구경하고 절집을 나서는데 어린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올라오는 젊은 부부가 보인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부드럽다. 나는 어느 결에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불심(佛心)만이 가득 차 있던 춘삼월의 불령사 계곡에는 여전히 물소리가 장했다.




덧붙이는 글 | 불령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용산리에 있으며, 대한 불교 조계종 제9 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불심이 계곡에 충만하다고 해서 불령사라 불린다. 절의 창건이나 연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다. 다만 신라 645년(선덕여왕 14) 원효 대사(元曉大師)[617∼686]가 창건하였다고 전할 뿐이다.


관련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94호로 지정된 불령사 전탑(佛靈寺塼塔)이 있다. 이 전탑은 좁다란 골짜기의 절벽 위 널찍한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로 쌓아 올렸다. 이 외에 조선 후기인 17∼18세기의 특징을 띠고 있는 석조여래좌상 1구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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