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루수 우잘라>, 자연과 문명의 경계에 대하여
언젠가 강화읍에 있는 작은 책방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그 책방은 초등학교 근처에 있어 방과 후면 아이들이 놀러왔습니다. 책방 주인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폭신한 소파도 있고 엎드려서 책을 볼 수 있는 매트도 깔아 두었습니다. 학교 공부를 마친 아이들은 책방으로 놀러와 마치 자신의 집이기라도 한 양 서가의 책을 빼들고 독서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책방 주인은 아이들을 성숙한 인격체로 대합니다. 잔소리도 하지 않고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은 있으니, 서점에서 놀고 싶으면 반드시 책 한 페이지는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점 주인은 늘 그렇게 아이들에게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그곳에서 저도 또 다른 세상을 만났습니다. 광활한 대륙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이란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이십여 년간 쫓아다닌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수리의 시호테알린 산맥으로 들어가 호랑이를 찾아다닙니다. 한반도의 백두대간과 이어져 있는 시호테알린 산맥은 현재 약 350여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시베리아 호랑이들의 주 서식지입니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야생에서 호랑이와 마주치기는 평생에 한 번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생의 시베리아 호랑이를 찍은 동영상도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쓴 박수용 다큐멘터리 감독은 무려 1,000여 분 이상 되는 분량의 시베리아 호랑이 동영상을 찍었습니다. 사진도 물론 많이 찍었습니다. 평생에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렵다는 호랑이를 그렇게 많이 촬영하였다니, 책을 쓴 저자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시베리아 호랑이의 주 서식처인 우수리 지역이 궁금해졌습니다.
시베리아는 러시아 우랄산맥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북아시아 지역을 말합니다. 시베리아와 중국의 북동부인 만주를 나누는 경계는 흑룡강(아무르강)입니다. 강 위쪽은 시베리아고 그 아래는 만주입니다. 우수리 강은 두만강 북쪽에서 시작하여 아무르 강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우수리 강은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이 강에서 동해까지를 ‘연해주’ 또는 ‘우수리’라 부릅니다.
우수리, 연해주 지역은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세력은 우수리까지 뻗어 있었으며 발해 때는 이곳에 동경(東京)이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 철종 때부터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후 일제시대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구한촌과 신한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기반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항일지사들도 많았습니다.
우수리(ussury), 극동 시베리아 탐사 기행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이란 책을 통해 우수리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던 차에 <데루수 우잘라>란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영화일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이 영화는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75년에 만든 것으로 우수리의 광대한 자연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읽었던 <데루수 우잘라>라는 책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는데 1975년에 러시아의 요청으로 그 영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데루수 우잘라' 역은 실제 그곳 원주민 중에서 뽑았고 촬영 역시 2년간에 걸쳐 우수리에서 했으니 이 영화는 우수리를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곳의 사계를 잘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데루수 우잘라'를 그리워하는 탐사대장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러시아군 장교인 그는 1902년부터 1910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탐사대를 이끌고 우수리 지역을 탐사합니다. 당시 우수리는 지도상에 완벽하게 공백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알려진 게 없었습니다. 지도를 만들기 위해 탐사에 나선 그는 그곳의 원주민 사냥꾼인 '데루수 우잘라'를 만나게 되고, 그를 길 안내인으로 고용합니다.
'데루수 우잘라'는 우수리 지역의 원주민인 고리드족 사냥꾼입니다. 이 종족은 우수리 강 유역에서 살며 물고기를 잡거나 동물을 사냥해서 생활합니다. 영화에서 데르수가 그랬듯이 이 종족은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또 두려워해서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데르수는 자연을 인격체로 보고 대합니다. 별도, 안개도, 또 물고기와 사슴도 다 '사람'으로 지칭합니다. 그는 그 사람들과 '말'을 나눕니다. 그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바위 같은 모든 존재에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자연도 사람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서로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비를 피해 머물던 오두막을 떠날 때면 데루수는 꼭 성냥과 쌀 한 줌을 남겼습니다. 언젠가 오두막을 이용할 다음 사람을 위한 그의 배려였습니다. 먹고 남은 고기를 없애버리기 위해 불에 던져 넣는 사람들을 보고 데루수는 “우리가 떠나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올 건데 아까운 고기를 왜 버려?”라고 말하며 불에서 끄집어냈습니다. 원시림 속에 올 사람이 누가 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말고 또 올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너구리도 와. 오소리도, 까마귀도 와. 쥐도 오고 개미도 와. 타이가엔 '사람'이 많이 산다.”고 말합니다. 데루수에겐 그 모든 생명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고, 그래서 개미 같은 작은 곤충도 늘 염려했습니다. 그는 타이가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친구로서 사랑했습니다. 그는 만물을 인간과 동일시했습니다.
숲의 사람, '데르수'
데루수는 사소한 물건들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아내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그것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체득한 지혜였습니다. 바람과 구름의 흐름을 보고 날씨를 예측했으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낡은 신발 한 짝만 보고도 그 신발을 신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아냈습니다. 젊은 사람은 빨리 걷기 위해 체중을 발끝에 싣지만, 노인들은 발바닥 전체에 체중이 분산되도록 발뒤꿈치로 걷습니다. 낡은 신발 한 짝만 보고도 그는 신발의 주인이 늙은 사람인지 아니면 젊은 사람인지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을 숲과 함께 살아오면서 익힌 그 지혜는 상처를 입어가며 몸소 익힌 그만의 자산이었습니다.
일찍 얼음이 얼고 이듬해 4월이 되어야 해빙이 되는 우수리 지역은 영하 30~4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가혹한 땅입니다. 더구나 얼음이 녹으면 강이 범람해서 주변을 휩쓸어 버립니다. 영화를 보노라니 감히 넘볼 수 없는 광활한 자연이 오히려 사람보다 더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 앞에 인간은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탐사대장은 데루수의 말을 듣지 않고 정찰을 나갔다가 그만 돌아갈 길을 잃고 맙니다. 부하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허공에 총을 쏘지만, 그 소리마저도 눈보라와 바람이 잡아먹어 버립니다. 눈 위에 난 발자국 역시 바람에 지워져 버렸습니다.
자연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루수는 어느 순간 바람의 결을 조심스레 살피더니 미친 듯이 마른 풀들을 베어 모으기 시작합니다. 얼마 안 있어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그들은 풀 더미 속에 몸을 묻고 매섭고도 거센 눈보라를 견뎌냈습니다. 데르수의 빠른 판단이 없었다면 그날 밤 두 사람은 꼼짝없이 얼어 죽었을 것입니다.
지혜롭게 자연을 극복하고 헤쳐 나가는 데루수 덕분에 탐사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데루수는 예전과 달리 사냥감을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나이가 든 그는 시력이 약해졌고, 총을 쏴도 사냥감을 빗맞힐 때가 많았습니다. 데루수와 깊은 인간적 교감을 나누던 탐사대장 블라다미르는 그를 냉혹한 자연 앞에 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냥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데루수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루수를 데리고 도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데루수를 위하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도시에는 없는 게 없으므로 데루수가 사냥을 하지 않아도 편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블라디미르의 오판이었습니다. 숲의 사람인 데루수에게 도시는 없는 것투성이였습니다. 물도 돈을 주고 사 먹고 땔감도 돈을 주고 구해야만 하는 것을 데루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데루수는 도시가 낯설다 못해 두렵기까지 합니다.
결국, 데루수가 있어야 할 곳은 숲인 것을 안 블라디미르는 사냥하기에 좋도록 망원경이 달린 신형 총을 구해서 데루수에게 줍니다. 눈이 어두운 데루수를 위해 한 이 일이 나중에 데루수의 목숨을 빼앗게 될 줄은 그도 데루수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자연
숲으로 들어간 데루수는 얼마 안 있어 목숨을 잃습니다. 망원경이 달린 총을 탐낸 사람이 데루수를 살해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블라디미르는 한달음에 우수리로 떠납니다. 그는 데루수의 시신을 숲 속의 큰 나무 밑에 묻고 표시를 해둡니다. 큰 나무를 표식 삼아 데루수의 무덤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렇게 했습니다.
몇 해 뒤 데루수의 무덤을 찾아간 블라디미르는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숲이 개발되어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베어지고 숲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데루수의 무덤 자리도 흔적없이 사라졌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던 시대는 사라져갔습니다. 연해주지방의 개발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시림은 사람들에 의해 뭉개졌습니다. 숲에 깃들어 살던 동물들도 사라졌습니다. 기찻길이 숲 한가운데로 뚫리면서 호랑이가 포효하던 땅에는 기관차가 내달리게 됩니다. 검은담비나 붉은사슴도 사라져 가고 시베리아 호랑이도 사라져 갔습니다. 자연과 함께 한 몸이었던 사람들도 사라져갔습니다.
이른바 문명인의 관점에서 보면 ‘데루수 우잘라’는 야만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문명인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인'이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이 그의 친구였고 나무와 시냇물, 물고기와 사슴 등도 역시 그의 친구였습니다. 데루수의 말 그대로 그 모든 것들은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문명인들은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원주민들은 야만적이라고 낮춰봅니다. 진정 무엇이 문명이고 또 무엇이 야만일까요.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약탈하고 포획하는 탐욕이 과연 문명일까요. 야만(자연)에 길든 데루수가 문명(도시)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문명에 길들어 있는 우리는 결코 자연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무엇이 문명이고 또 무엇이 야만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라져 간 것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데르수 우잘라(Dersu Uzala,1975년)
감독 : 구로자와 아키라
출연 : 막심 문주크, 유리 솔로민
수상 내역 :
1976' Academy Awards, USA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1977' Cinema Writers Circle Awards, Spain 최우수 예술상
1977' David di Donatello Awards 최우수 감독상
1978' French Syndicate of Cinema Critics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1977' Italian National Syndicate of Film Journalists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1975' Moscow International Film Festival 그랑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