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한 조건은 없다.
오후 1시 카페 프리헷.
아이들 미용실 예약시간까지 1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이곳 카페 프리헷에 노트북을 들고 들어왔다. 1시간 동안 나는 생각나는 대로 쓸 것이다. 왜냐하면 오후의 글쓰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후이고, 저자는 그냥 쓰라고, 어떻게든 쓰라고, 아무렇게나 쓰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무도 읽을 사람이 없으니 그냥 쓰기만 하라고. 오늘도 쓰고 있으면 어제보다 발전한 나만 있을 뿐, 애써 다이어트를 한 후 되돌아오는 요요 같은 건 없다고. 이 작가님 진짜 글 잘 쓰시네. 글쓰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독자. 이렇게나 저자의 요구에 부합하는 독자가 있을까.
나는 언제부터 글을 쓰고 싶었나.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사전에 진행되어야 할 작업이 있다. 글 읽기. 글 읽기가 먼저고, 글 쓰기가 나중이다. 읽은 게 많아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어쨌든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나는 글을 읽었어야 하는데, 꼭 그렇게 살아온 것만은 아니다. 여느 현대인들처럼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잘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기는 했다. 그렇다. 책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내용은 모르더라도.
그럼 언제부터 책에 관심이 있었을까. 학창 시절에 읽은 책은 소설 종류 몇 권뿐이었던 것 같다. 직장 다니면서는 바빠서 못 읽고. 아, 회사에 독서모임이 있어서 참여하기는 했으나, 억지로 읽은 것 같다. 남은 게 없다.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책 육아를 시작했다. 회사언니한테 받은 육아서 한 권으로 시작된 책 육아였다. 그 육아서에 나온 전집이랑, 유명한 단행본 등을 사서 아이에게 읽어주었고, 곧 도서관도 이용하게 되었다. 책을 읽어주면 아이도 좋아하고, 나도 시간이 잘 가서 좋았다. 아이에게 이 세상의 좋은 책은 다 읽어주리라 마음먹으며 읽어주었던 것 같다. 책 읽어주는 게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이런 긍정적 작용이 있어서인지, 나는 육아서를 더 사서 읽게 되었고, 벽이란 벽은 아이책과 내 책으로 변해갔다. 리스트를 작성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한 달에 한두 권 정도는 읽었다. 아이의 책을 사는 일은 매우 신이 났다. 이 책을 읽어주면 아이의 뇌가 활짝 피어나 더 영롱한 열매를 맺을 것만 같았다.
아무튼 책 육아 12년 차 짬밥이 생긴 걸까.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막막한 현실이었다. 글을 써 본 적도 없고, 그 흔한 블로그나, SNS도 하지 않았던 터라. 글의 주제는 보통 아이에 관한 것일 텐데, 일기장에 일기를 쓰자니 아이가 볼 수도 있고, 내키지가 않았다. 아이에 관한 감정이 늘 따뜻하고 다정한 것만은 아니라, 혹여 신랄하게 드러낸 나의 감정이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글을 선뜻 쓰기가 어려웠다. 그때 브런치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후의 글쓰기 작가님처럼 '누가 본다고' 하면서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글로 녹여냈더라면. 짧은 글을 매일 한 편씩 올리셨다는 부분에서, 나도 '이거다' 싶었다. 길든 짧든, 좋은 글(일리는 없지만)이든, 안 좋은 글이든 그냥 쓰기로 했다.
나는 퇴고가 무서웠다. 더 좋은 표현으로 바꾸는 것. 이미 내가 아는 최고의 표현을 찾아 글을 쓴 것이기 때문에 더 좋은 표현으로 고치는 일은 고되고 힘들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질문했다. 3기가 묻고 1,2기가 답한다에.
"퇴고가 너무너무 귀찮을 땐 어떻게 하나요?"
친절한 선배님께서 대답해 주셨다.
"퇴고가 너무 귀찮을 땐 안 합니다."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다. 퇴고가 무서워 글을 안 쓸 뻔했는데, 퇴고를 안 하더라도 글을 쓰는 방향을 택했다. 이제 아이들 데리고 미용실에 가야겠다.
고마워 카페 프리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