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친 내 감정이 부끄럽던 나에게
"아빠, 그거 그냥 거기 둬요. 아니 내가 치운다니까."
부산스럽게 나의 짐을 옮기는 아빠에게 툭 건넸다. 내가 해도 되는 일을 굳이 신경 써서 챙기는 아빠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토요일은 아빠에게도 쉼이 필요한 날이니까. 그런 일은 내가 해도 괜찮으니 아빠는 좀 쉬시라는 마음이었는데 내뱉어 버린 말이 너무 거칠고 퉁명스러웠다. 내가 던진 말이 나에게 돌아와 나를 한 대 치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렇게 느꼈다면, 아빠도 비슷한 크기로 그 감정을 느꼈으리라. 나는 아차 싶었다. 이렇게 말할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나는 왜 이리 못나게 말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밉고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을 하지. 왜 다정하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지. 더 이상 사춘기도 아니고, 내 마음을 스스로 돌보며 살아야 하는 어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완전하고 모난 모양이 내 마음의 상태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마저도 화가 나고 싫었다. 나는 왜 이리 삐쭉삐쭉 날을 세우며 살까. 안 예쁜 말을 쉽게 할까. 순식간에 또 나에게 화가 났다. 나는 이토록 거칠고 자주 열 받는 사람이었다.
항상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스며들면 그 순간에는 말이 공격적으로 나갔다. 불편함이라는 게 늘 나를 공격하거나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태연한 태도로 미소를 지어야 하는 것도 어른의 일이었다. 불편할 때 웃으며 식사를 해야 하는 게 내 월급 값이라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편한 마음이 포착이 될 때 자꾸만 온몸이 경직됐다. 몸이 굳으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언어가 딱딱하고 빠르게 나갔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 내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스스로를 감출 수도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나는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중에서 소홀하게 대하거나 함부로 굴어도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잔뜩 날이 선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관계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모난 말을 뱉는 것은, 뱉는 순간 제일 먼저 내가 듣게 되는 나의 언어였다. 내 말이 거칠고 내 마음에 불길이 일수록 가장 뜨겁게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늘 그런 분노의 온도를 품고 살았다. 작은 것에도 화가 나고, 화가 나서 마음이 불편할 땐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뜨거운 언어는 곁에 있던 사람에게도 쉽게 전해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물을 끼얹어주었고, 누군가는 불길을 피해 달아났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싫었다. 도대체 이 분노와 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국밥 언제 나와요?"
"아, 금방 나와요. 거의 다 됐어요."
빨리 먹고 가려고 선택한 메뉴였건만, 넓은 홀에 일을 하시는 분은 단 한 명이었고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은 그 많은 주문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 원래 일하시던 이모님들이 휴가를 가셔서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장님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손님을 받았고, 손님들은 국밥 한 그릇을 4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오래 걸린다는 안내도 없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자리는 가득 찼는데 식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배달 주문을 꾸역꾸역 받던 사장님.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손실도 싫고 손님을 적게 받는 피해도 받고 싶지 않으면서, 손님들의 시간은 다 잡아먹어도 된다고 여기는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났다. 머리가 뜨겁고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분노를 당장이라도 폭발시켜서 이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었다. 나는 여러 번 벌떡 일어섰다. 내 지인들은 황급히 내 손을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에는 내 감정의 폭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거칠게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굳이 내 감정을 날카롭게 드러내거나, 상대에게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일임에도 나는 마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화라는 것이, 또 분노의 감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한 것이라서 표현하고 나면 그 마음이 식는 것이 아니라 더 뜨거워졌다. 화가 더 나고, 분노를 더 표현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 모습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더 이상 나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고, 주변을 애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언제 화가 나는지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갈 때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 지금 나 열 받았다. 왜지? 나 지금 왜 화가 났지? 지금 나 어떻게 하고 싶지?'처럼 나를 파헤치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했다. 동시에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지금 우리 모두 화가 나는 상황인데 저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지? 그들은 화를 어떻게 해소하고 있지? 이 감정은 결국 어떻게 끝나지?' 등등 화를 내게 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해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분노의 언어를 사용해서 더 크게 내 의견과 생각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들어줘!'였다. 마음이 상하고, 감정이 깊어진 내가 하는 이야기를 타인이 듣게 하기 위해서 더 강하고 뜨거운 단어들을 골라 화살을 던지듯 날려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조용하게 혹은 선량한 단어를 사용해서 전달하면 상대가 귀 기울여 듣지 않을 것이라는 나만의 걱정이 서려있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 나의 경험이자 내 판단이었다. 화나는 나를 살피다 보니 몸을 크게 키워서 상대를 제압하려 하는 공작새가 보였다. 감추고 싶던 지점이 환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창피했다. 나는 그렇게 나를 하나씩 찾아가며 고쳐가기 시작했다.
열 받아도 괜찮아.
나의 감정과 화에 대해 깨달은 것들 중에서 가장 신선하고 놀라웠던 점은 화를 내는 것이 부끄럽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내는 것 자체를 문제로 봤다. 화가 나는 내가 싫어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건만 나를 열 받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자주 일어났다. 나 혼자 겪는 일상에서부터 모두가 아는 사회적 이슈까지 주제도 내용도 다양했다. 기사를 보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이들과의 사투도 나를 힘들게 했다. 자신의 권리는 침해당하지 않고 싶으면서도 타인의 권리는 쉽게 짓밟는 일들이나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모른 체 하는 사람들,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는 사람까지. 몰상식과 염치없음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다양한 사건과 사고 역시 나의 분노 버튼을 꾹 눌렀고, 나는 금세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분노의 에너지를 품고 사는 사람이고 그래서 조금 더 예민하게 많은 부분에서 화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일도, 틀린 일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법과 표현을 사용해서 정중하게 화를 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화를 낸다는 것은 확실히 강력한 무기라서 쉽게 사람을 상처 입게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신중하게 화를 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단지 상처 입히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그건 올바르게 화를 내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상처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결과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처한 상황에 대해서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기분이 언짢고 화가 나고 불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화가 통하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빠르게 내 말의 의도를 깨닫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열 받게 한다면 그곳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 화를 내서 나를 상하게 하지 말고, 그저 그 자리를 피해서 지나가면 된다. 그게 상대와 나를 상처 입히지 않는 방법 같았다. 나는 그렇게 화를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네가 대신 한 마디 해주면 안 돼?
나는 이렇게 분노하고 화를 내던 나의 에너지를 창피하게 여기거나 싫어했는데, 오히려 그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주변에 많았다. 너처럼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부럽다고, 나는 말을 못 해서 참고 사느라 속병이 나서 쓰러질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할 줄 아는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는 사람까지.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주변에 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꼭 해야 하는 말들도 참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가 나지 않는 게 아니라 화를 낼 줄 몰라서 그저 참고만 사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내가 대신 분노를 표현해주거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나로서는 다소 당황스럽기도 놀랍기도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화가 필요한 일도 너무 많았다. 때로는 크게 말을 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옆 사람만 들을 수 있도록 소근소근 말하면 안 된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알아볼 수 있도록 크고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럴 때, 나의 화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가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잘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좋은 재료였다. 한마디로 건강한 분노는 사회의 숨겨진 부분을 들추고, 곪은 부분을 터트리고, 무너져야 하는 곳을 박살 내는 최고의 에너지였다. 나는 그게 정당한 화라는 것을, 착한 분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화를 잘 사용한다면 그건 세상을 바꾸는 멋진 일이었다.
나의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 것인가
세상은 여전히 나를 화나게 하는 많은 이들의 연속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속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진짜 나다. 나는 내가 가진 화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사람이고 싶고, 잘못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똑바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그게 내가 가진 화를, 분노를 잘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모습을 외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진 것을 장점으로 잘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가진 화를 가지고도 나는 많은 일들을 새롭게 만들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것이 관건이었다. 뜨거움이 필요한 곳에 내 분노를 사용하고, 분노가 필요한 일은 상처를 입히지 않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 그것이 내가 나를 잘 사용하고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오늘도 화가 나는 상황을 마주할 때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해준다. '열 받아도 괜찮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