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진정한 어른을 만나다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몇 년 전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고 몸이 거꾸로 꽂히는 것 같은 전율과 감동을 느낀 이후로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끈기 있게 끝까지 봐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 당시 몇 날 며칠을 묵상(?)하듯 떠올리고 되새기며 봤었던 것이 ‘요한, 씨돌, 용환’이었다. 민주화 운동부터 굵직한 한국사의 한 꼭지마다 발견되는 한 사람을 찾아가는 내용이었는데 누군가는 그를 ‘요한’이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그를 ‘씨돌’이라 기억했다. 자신의 흔적을 지워가며 꼭 필요한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던 사람. 너무 믿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일대기라 그를 주제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었으면 호응이 없었을지 모른다.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은 스토리라 다큐멘터리로 다뤄진 것이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 갑자기 떠오른 김에 책도 읽어봐야겠다.
그 덕분에 이 다큐에도 기대감이 컸었다. 대체 저 사람은 누굴까.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른’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도 될만한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그의 삶 역시 ‘요한’씨와 다를 바 없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동생들을 돌보던 김장하 씨는 한약방을 열고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효능으로 전국에서 찾는 한약방을 운영하게 되고 그렇게 모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삶을 산다. 이 돈은 환자들이 아파서 낸 돈으로 번 것이니 나를 위해서 막 쓸 수 없고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교도 설립하고, 돈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며 베푸는 삶을 실천한다. 그에 대해 아는 이들은 그가 화를 내거나 자기 자랑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의 삶의 걸음이 너무 대단해서, 모두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뜻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마음에 남는다.
돈은 똥과 같아서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밖으로 흩뿌리면 거름이 된다
돈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생계비를 지원하면서도, 한 번도 훈계나 조언을 건넨 적 없었다는 분. 오히려 이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선생님의 배려를 뒤늦게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받았던 은혜를 어떻게든 갚고 싶다는 사람에게도 갚을 것이 있다면 사회에 갚으라고 말하시는 깊이는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걸까. 자신의 자랑으로 이어질만한 질문에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상이나 인터뷰도 거절하며 자신이 맡은 한약방을 운영하고 학생들에게 베풀고 사회에 필요한 곳에 나누는 삶 하나만을 오롯이 살아내신 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인지 너무 놀랍다.
지역 방송국에서 제작한 다큐가 상을 받는 일이 정말 희귀한 일이라고 하는데, MBC경남에서 제작한 이번 다큐멘터리는 백상예술대상에서 ‘나는 신이다’를 제치고 수상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의 화제성도 없었던 이 다큐가 어떻게 큰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삶 자체가 감동이자 전율이니까. 결국 사회는 무수한 악인과 나쁜 놈들로 넘쳐나는 것 같지만, 세상은 선한 사람 한 명으로 인해 채워지고 자라난다. 그 한 명이 가진 영향력이 훨씬 더 위대해서 선한 삶의 흐름은 서로의 마음을 통해 이어지고 흘러가기 마련인가 보다.
내가 해낸 아주 작은 것 하나도 알려지길 원하고, 밝히 드러나길 바랐던 내 삶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다. 어디서든 주목받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고집하던 삶의 모습이 참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그렇게 사는 게 나에게 기쁨이 된 적이 없었고 늘 더 드러나지 않는 내 모습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목적도 없는 일에 달려들어 공격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 삶을 내 손으로 만들고 있었다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무엇보다 그의 ‘떳떳하고 선한’ 삶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누구 앞에서도 떳떳한 삶.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매사에 경계하고 노력하는 검소하고 투박한 삶.
겸손하고 조용한 삶을, 그러나 묵묵히 누군가를 돕고 나누는 삶을 정말 살아내고 싶다.
그때에야 내 삶의 의미를 깊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