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니다 보면 자의거나 타의거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든 간에 몇 가지 인생의 진리를 몸으로 배우게 된다.
나는 원래 책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온 세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만심 가득한 이론주의적인 인간이었는데, 여행의 경험으로 인해 지금은 완전히 경험주의자가 되었다.
만약 내 앞에 똥과 된장이 있다고 치자(혹시 식사하며 보고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첫눈에 쉐입과 냄새로 무엇이 똥인지 구분해내어 바로 눈앞에서 치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게 똥이 아닐 수도 있다는 1퍼센트의 확률, 나의 이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 때문에 굳이 내 손가락을 희생시켜 똥과 된장을 둘 다 찔러본다.
예상한 대로 결론이 나도 상관없다. 어리석은 그 행동으로 인해 나는 똥과 된장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경험에 의거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됐으니까.
난 후회 없는 선택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론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은 직접 경험하며 몸으로 부딪히는 거였다.
경험주의자로서의 삶은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그래서 후회가 적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평생 스스로가 두뇌파 인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경험으로 배운 ‘진리’는 평생토록 잊히지 않는다.
내가 여행에서 배운 진리가 하나 있다. 이 진리는 어느 나라, 어딜 가도 먹힌다.
바로 “길을 모를 때는 그냥 사람 많은 방향으로 따라가자.”다.
옛말 중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가 있다.
난 이 말이 참 싫었다. 왜냐면 나도 ‘똑같은 사람’중 하나가 될 거란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것도 조상들의 경험에서 나온 진리였는지, 정말 사람 사는 거 어딜 가나 비슷하다.
인터넷에 ‘로컬 맛집’이라고 쳐서 나오는 곳에 가보면 관광객들만 보이는 거처럼 말이다. 내 검색 신공이나, 저 사람들 검색 신공이나 거기서 거기다.
그리고 가끔은 나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내가 히드로 공항에서 런던 시내로 들어갔을 때가 딱 그랬다.
‘히드로 공항에서 런던 시내’라고 검색하면 맨 상단에 나오는 내용이 있다. 바로 ‘내셔널 익스프레스’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이다.
내셔널 익스프레스의 버스는 일찍 예매할수록 유리하다. 남는 좌석이 적어질수록 티켓 가격도 함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똑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목적지에서 내려도 누구는 6유로에, 누구는 10유로에 갈 수 있다.
버스 티켓을 미리 예매할 수 있다면 내셔널 익스프레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동수단이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절대로 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저가항공사 중에 ‘라이언 에어’라는 곳이 있다. 아마 익숙한 분들도 계실 거다. 유럽 내에서 굉장히 활발히 이용되는 항공사다.
여기는 특이한 문화가 하나 있다. 비행기가 도착지에 무사 착륙할 시 승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
처음 이 광경을 목격했을 때는 승객들이 전부 기장님의 학연 지연 혈연인 줄 알았다. ‘기장님한테 무슨 축하할 일이 생겼나? 혹시 이거 프러포즈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진짜로 프러포즈 이벤트였으면 좋았을 것을.
여행하며 만난 친구가 말해주었다. 라이언에어가 비행기도 작고 사건사고도 워낙 많이 일어나서 무사히 착륙했다는 거 자체가 축하할 일이란다.
내가 진짜 목숨 내놓고 여행을 하는구나, 라는 실감이 바로 들었다. 그렇다고 안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걔만큼 운항이 활발하고 저렴한 비행기도 없으니까 말이다.
이 얘기까지 들었는데 어찌 혼자 송장처럼 앉아만 있을 수 있으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열과 성을 다하여 승객들 사이에서 박수를 치고 있더랬다.
내게 비행기는 그런 교통수단이었다. 위험하고, 항상 변수가 존재하는 것.
돈이 없다는 건 그랬다. 돈이 없기에 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할 때도 있었고, 없는 만큼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써야 했다. 내게 닥칠 모든 예상 밖의 상황들을 가늠하여 미리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내셔널 익스프레스 버스를 미리 예매하지 못했다. 비행기가 지연되어 버스를 놓칠 가능성이 있었다. 땅에 6파운드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캐리어를 빠르게 챙겨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제발 버스 티켓아 비싸지만 말아라’라고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마치 출근길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당장 저 사람들 따라가!!”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리에 섞여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중간중간 표지판을 확인했다. 아니다 나를까 이들은 런던 시내와 이어져 있는 지하철로 향하고 있었다. 런던에도 공항철도가 있었던 것이다. 역무원의 친절한 안내로 무사히 교통카드 ‘오이스터 카드’도 발급받았다.
그렇게 나는 예상치 못 한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런던 시내에 도착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다시 또 화가 울컥 올라왔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피카츄 보조배터리를 뺏어간 베이징 공항이여. 나는 아직까지도 당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목적지인 ‘하이드 파크 코너’ 역에 내렸다. 그리고 지하철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지도를 카메라로 찍었다. 캡처해둔 게스트하우스 지도 사진과 비교하며 찾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여유로운 표정과 걸음걸이로 언더그라운드를 나섰다. 마치 고향에 돌아왔다는 듯한 느낌으로 말이다.
내가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혼자 여행할 때는 웬만하면 처음 온다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 것이 좋다. 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불안한 눈빛을 내비치는 순간 별의별 인간들이 다 달라붙어 사람을 귀찮고 곤란하게 만든다. 특히 동양인에 여자라면 더더욱 좋은 타깃이 된다.
나는 실제로 영국은커녕 유럽에 발을 붙이는 거 자체가 처음이지만, 마치 몇 번 와본 사람인 거처럼. 여기는 마치 내 구역인 거처럼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간다.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언어는 토익 듣기 평가고 배경음은 위협적인 사이렌 소리지만, 마음으로는 카라의 프리티걸을 불러야 한다.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물론 항상 통하는 방법은 아니다. 때론 대놓고 도움이 필요하단 걸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분위기를 봐서 눈치 있게 스탠스를 정해야 한다.
다행히 이날은 이게 먹혀들어갔다. 나는 친절을 가장한 사기꾼과 마주치지 않고 안전하게 호스텔에 도착했다.
내가 2박 3일간 묵기로 한 게스트 하우스의 이름은 ‘스마트 하이드 파크 뷰 호스텔’이었다. 이곳은 이름처럼 하이드 파크 근처에 위치했다.
주변에는 비슷한 게스트 하우스가 몇 개 더 있었다. 숙소 앞에는 맥주병을 든 여행객들이 만남의 장을 펼치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가격은 2박 3일에 약 4만 9천 원. 런던 숙박비 치고 꽤 저렴한 가격이다.
런던 물가가 비싸다는 이야기는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큰 지출을 하게 되면 이후 여행 일정에 큰 지장이 생길게 뻔했다. 그래서 나쁘지 않은 위치의 가장 저렴한 숙소를 찾아서 예약했다.
당연히 방은 여러 명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 룸이었다.
혹시 살면서 3층 침대를 본 적이 있는가? 나도 그동안 침대는 2층까지만 있는 줄 알았다.
3층 침대. 솔직히 글자로만 봤을 때는 별 감흥 없었다.
도미토리룸은 보통 2층 침대가 놓여 있다. 지난 여행에서 2층 침대를 이용하며 별로 불편해본 적이 없기에 3층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나의 이런 안일한 태도 덕분에 이른 나이에 관 속에 누워보는 임종체험을 영국에서 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