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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Oct 18. 2021

이상한 경험도 경험은 경험이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서 와이파이부터 연결했다. 카톡 아이콘 위로 붉은색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내가 다시 인간관계에 연결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카톡 알림 숫자가 이상하게 평소보다 많았다. 


나는 제일 대화가 많이 진행된 단톡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러나 가장 바라고 있었던 호재가 쓰여 있었다. 다른 카톡방도 같은 이야기 중이란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고 있니?]

[네가 있었다면 함께 축배를 들었을 텐데]

[돌아와]


눈을 몇 번이나 끔뻑거리며 말풍선 위의 뉴스 캡처 사진을 입을 떡 벌린채로 쳐다보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여기서 자랑 아닌 자랑 한 번 하겠다. 

흥미롭게도 박근혜의 탄핵소추안은 내 생일날 가결됐다. ‘대한민국이 나에게 생일선물 하나 거하게 해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유럽에 도착한 첫날 탄핵이 선고된 것이다. 자의식 과잉처럼 들린단 거 안다. 하지만 기념적인 날,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자의식 좀 과잉하면 어떠랴. 덕분에 할머니 돼서 자서전에 라떼는 말이야, 라며 쓸 내용 한 줄 더 생겼다.


유럽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출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국은 벌써 빠르게 변해  가고 있었다.


3층 침대와의 첫만남은 최악이었으나, 막상 겪어보니 그렇게 또 나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1년 전 동남아 배낭여행에서 별의별 게스트하우스를 다 겪어본 덕분인 듯했다.


1년 전, 그때도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캐리어 하나 덜렁 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뭐랄까, 이것도 경력직이라면 경력직이랄까. 


그리고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나이트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당시에도 돈이 없는 건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이라 돈이 더더더더 없었다는 거 정도? 


방콕은 수도라 치앙마이보다 전반적으로 물가가 많이 비쌌다. 그래서 저렴한 곳을 찾아 계속 이리저리 숙소를 옮겨 다녔다. 


… 그러다 그곳에 도착했다.


더 오버 스테이 아트 호스텔. 



건물 하나를 전부 사용하는 꽤 큰 호스텔이었다. 1층은 저녁시간부터 새벽까지 운영하는 바였고, 객실은 2층부터 이어졌다. 인테리어 하나하나 스트릿 감성이 물씬 느껴졌고 벽에는 개성 있고 예술적인 그래비티들이 가득했다. 


… 그래 솔직히 말하겠다. 좀 무서웠다. 난 처음에 무슨 마약 굴에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1층 바까지는 좋았다. 자유분방하고 예술적인 거? 나도 좋아한다. 나도 나름대로 예~술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이니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 존중? 완전 오픈 마인드였다.


그러나 내가 묵을 3층의 도미토리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 싼 거 찾다가 (여러 가지를) 다 털릴 수도 있겠구나.”라는 외침만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 호스텔 이름을 검색해보려 나갔다 들어 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인터넷에 '더 오버 스테이 아트 호스텔'이라 치면 나오는 사진은 내가 설명하는 분위기와 조금 거리감이 있다. 


마치 내가 뭐 대단한 경험 하고 온 사람처럼 보이려고 오버하는 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사이 예쁜 그림도 생겼고, 옥상도 개방하고 화장실도 깔끔하게 정돈한 거 같으니까. 


그러니 2016년 당시에 내가 굳어버린 햄스터 꼴로 목도한 호스텔의 사진을 첨부하겠다. 



물론 이 호스텔을 욕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주인은 친절했고, 같이 묵었던 관광객들도 상당히 젠틀했다. 


경험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호스텔이었다. 다만 그 경험이 굉장히 색달랐기에 뇌리에 강하게 남아 버렸을 뿐. 


도미토리룸은 2층 침대 뿐이었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는 침대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 2층 침대 쓰는 사람은 어떻게 올라가냐고? 일단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장착하고 1층 사람에게 “익스큐즈미”라며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한 번에 끝낼 수 있도록 가차 없이 1층 침대를 밟고 점프해서 올라간다. 여기서 실수해서 떨어졌다가는 1층 침대 주민 방방이만 태워주게 된다.

이런 시설(?) 덕분에 룸메이트들과 자연스레 안면도 트고 참 좋았다. 


호스트 중에는 회색 빛깔 고양이도 한 마리 있었다. 앞마당부터 바, 호스텔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여행객들에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살갑고 귀여운 녀석이었다. 


이 녀석 덕에 바퀴벌레 하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벽틈에서 튀어나온 바선생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가 먹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으니까. 


나름 소중한 경험이었다. 게스트 하우스 운영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며 나의 편협했던 시야를 확장시켜준 터닝포인트 같은 곳이랄까. 


그래도 에어컨 하나는 정말 빵빵했다. 가끔 동남아 호스텔 중에 양심없이 '노 에어컨 룸’ 옵션으로 싸게 숙박을 여는 곳이 있다. 


순간의 잘못 된 선택으로 “싼 비지떡에는 독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다가 더위에 숨 막혀 죽을 뻔한 적이 있는가? 없다면… 평생 없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어디서나 적당히가 있는 법이다. 


이외에도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끔찍한 베드 버그 침대, 지나가던 사람도 멈춰 서서 나를 걱정해줄 만큼 다리를 물어뜯어놓은 모기 방, 밤마다 친절하게 친환경 ASMR로 천장 쥐 산책 사운드를 들려주던 호스텔 등등…


이런 경험들 덕에 비록 허리도 못 피고 와이파이도 잘 안 터지지만 잠만은 편하게 잘 수 있는 런던의 관 짝 같은 3층 침대가 양반처럼 느껴졌다. 


사실 침대보다 더 큰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콘센트였다. 

나는 3층 꼭대기 침대를 배정받았다. 콘센트는 1층 침대 옆의 어댑터뿐이었다. 자는 동안 누군가 충전해 놓은 핸드폰이나 카메라 배터리를 가져갈 경우에는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불안함에 결국 자다가 중간중간 일어나며 콘센트를 확인했다. 거의 3일 밤을 새운 데다가 시차 적응까지 피로가 말도 안 되게 쌓여 있었지만 도난 걱정에 예민해진 탓에 피곤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런던의 하루가 시작되고 나는 얕은 잠에서 깨어나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내려가 씻고 싶었지만 1층 침대를 이용하던 여자가 계단 아래에 모포를 깔고 태양을 향해 기도 중이었다. 나는 여자의 낮은 기도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조금 더 눈을 붙였다.


씻고 방에 돌아왔더니 충전기에 꽂혀있던 핸드폰이 선반 위로 옮겨져 있었다. 


그리고 내 거가 분명해 보이는 충전기가 방금까지 기도를 올리던 여자의 핸드폰에 연결되어 있었다. 


진짜 초등학생 때 메이플 스토리에서 캐시 사기당했을 때만큼 당황했다. 

아니 잠깐 화장실 갔다 오는 사이에, 내 눈앞에서 내 물건을 도둑맞는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칠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힐끔힐끔 여자만 쳐다봤다. 여자는 내 시선을 1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내 충전기에 꽂힌 자신의 핸드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러다가는 진짜 충전기를 빼앗겨 버릴 거 같았다. 외출하기 직전, 혼신의 힘을 다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거 네 충전기야?”

“아니? 너 건데?”

“… 나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돌려줄래?”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충전기를 뽑아 나에게 돌려주었다. 충전기를 가방 안 쪽에 깊숙이 넣으며 처음 느껴보는 이 황당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생각했다. 


혹시 내가 끝까지 돌려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돌려주지 않았을 수도 있단 가능성에 정신이 멍해졌다.


‘… 이거 뇌에 힘 안 주고 있으면 바로 코 베이겠는데.’


앞으로 내게 펼쳐질 일상이 고소하고 부드러운 버터맛이 아닌 코가 찡하고 끝이 날카로운 할라피뇨맛이라는 걸 이때부터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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