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런던에 도착한 첫날은 온전히 쉬는 거였다. 시차 적응도 해야 했고, 경유하며 공항 노숙도 하고, 비행기도 오래 타고 왔는 데다가 아주 프렌들리 한 뒷좌석 승객 덕에 제대로 눈도 못 붙여 버서커 상태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의외로 컨디션이 좋았다. 긴장으로 잔뜩 예민해져서 피로를 못 느꼈던 걸 테지만 그냥 내가 피곤하지 않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쉬려고 했던 날 컨디션이 좋아서 움직일 수 있으니 하루를 번 게 아닌가. 한국인의 특. 여행 와서 더 바쁘게 움직인다.
3월 11일은 토요일이었다.
런던의 ‘포토벨로 마켓’은 매주 토요일마다 열었다. 포토벨로 마켓은 영화 노팅힐에도 나왔던 유명한 빈티지 마켓인데, 운 좋게도 숙소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런던 거리를 구경하며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모든 게 신선하고 즐거웠다.
이런 게 여행의 장점이다. 평범한 걸음조차 특별한 경험이 되니까.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이 낡고 낮은 건물과, 뾰족한 첨탑의 고딕 양식 교회,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영자 간판과 표지판.
모든 게 낯설면서 동시에 익숙했다.
결국 5분에 한 번씩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느라 30분 거리를 1시간 동안 걸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길 잃을 걱정은 들지 않았다. 어제 공항에서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포토벨로 마켓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내가 갖고 있던 편견 하나를 고백하겠다. 유럽에 오기 전, 나는 유럽을 ‘시크’한 곳이라 생각했다. 워낙 영화에서 콧대 높고 고고한 캐릭터로 유럽인들을 그려놔서 그랬던 거 같다.
그 ‘시크’함의 절정에 있는 건 당연하게도 영국이었다(내가 오기 1년 전 탈유럽 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무미건조하지만 클래식하고 예의 바른 이미지. ‘젠틀맨과 레이디’를 통해 만들어진 스테레오 타입의 영국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
포토벨로 마켓에 도착한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좁은 도로에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서 사람들과 뒤섞이는 차량과 성난 클렉션 소리, 예쁘지만 퀄리티 낮은 기념품들을 파는 노점상들 옆으로 빈틈없이 꽉꽉 들어찬 관광객들.
그냥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방콕의 카오산 로드나 한강의 밤도깨비 야시장보다도 더 한 거 같았다.
그래도 다른 점은 있었다. 바로 거리 공연이다. 사실 이건 포토벨로 마켓이라서, 라기보다는 영국 문화의 특징이다.
별천지 사람 천지에 눈이 핑핑 돌면서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구경은하고 가야겠다며 안간힘을 냈다.
인간 물결에 휩쓸려가던 내 귀에 신나는 음악소리 하나가 꽂혀 들어왔다.
화려한 피아노 선율과 박자에 맞춰 따닥, 따닥 들리는 타악기음.
외면하기에는 너무 조화로운 음악이었다. 나는 소리의 출처를 따라 군중의 틈을 비집고 나아갔다.
놀랍게도 타악기라 생각했던 소리는 사람의 발소리였다. 남자가 피아노를 치면 여자가 그에 맞춰 탭댄스를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을 느끼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들려주었던 노래가 지금까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보며 내가 느꼈던 놀라운 감정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공연은 끝났지만 그들을 향한 함성과 박수소리가 또 다른 음률을 만들어 냈다. 나도 카메라를 내려놓고 진심을 다해 박수를 보냈다.
좋은 공연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관객은 많지 않았다.
거리에서 펼쳐지는 공연 모두가 뛰어났다. 그래서 훌륭한 공연임에도 눈에 띄지 않는 거였다.
나도 공연의 여운이 끝나자마자 아까부터 내 귀를 간질이던 아카펠라 소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포토벨로 마켓이 런던의 메이저 거리 공연장인지 여기저기서 재능들이 넘쳐났다.
그중 뇌리에 선명히 남은 중년 남자가 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인상이 깊게 남았다.
남자는 깔끔한 의상에 페도라까지 멋지게 차려 입고 통기타를 쳤다. 가볍게 부르는 곡에도 사람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에게서 어떤 경지에 이른 노련함을 느낀 건 그가 처음이었다.
척 봐도 수많은 공연을 해왔고, 거기서 쌓아 올린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졌다. 그의 표정은 조금 거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비난할 수 없었다. 진짜 겁나 잘하긴 했으니까.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라 기타도 겁나 잘 쳤다. 잘은 모르지만 소리가 맑은 게 기타도 비쌀 거 같았다.
그는 시민이 공연비를 내지 않으면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행동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건 자신의 재능에 대한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 당당함이 부러웠다.
한 번만 봐주세요, 제 작품 한 번만 봐주세요, 라며 여기저기 지원하던 내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가치를 완전히 깨닫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취했다. 그것도 예술 계통에서 말이다.
그를 보며 나는 언제쯤 저런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상상해봤다. 슬프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내 재능과 실력에 확신이 없었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아진 건 하나 있다. 내 실력에 대한 불명확함이 더 이상 우울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그렇기에 슬퍼 하기만 하며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천재형 인간이 내 길이 아니라면, 나는 미련 떨지 말고 빨리 나에게 맞는 길을 찾으러 가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도망치듯 떠난 여행도 ‘나한테만 맞는 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포토벨로 마켓의 혼란스러움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진짜 빈티지 아이템’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영향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성인이 된 후부터 인테리어 취향부터 사소한 소품들까지 전부 빈티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포토벨로 마켓은 보물섬이었다. 만약 기한이 정해져 있는 짧은 여행이었다면 여기서 산 물건들로 캐리어를 꽉 채운 것도 모자라 국제택배까지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 놓고 펑펑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이제 겨우 여행 이틀 차였다.
물건을 산다는 것은 여행 내내 들고 다니는 짐이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나의 욕심은 곧바로 내 어깨에 지워지는 무게로 나타났다.
나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욕심만 부려야 했다. 돈이 줄어들면 그만큼 여행할 수 있는 날들도 줄어들게 된다.
나는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포토벨로 마켓에서 하나하나 대응하기 귀찮을 정도로 수많은 인종차별을 당했다.
지긋지긋한 휘파람, 니하오, 고니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돌아가야 할 현실이 두려웠다.
나는 몇 년 안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포토벨로의 빈티지 아이템들을 전부 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는 이렇게 역병으로 전 세계가 마비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