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하던가.
눈앞이 핑돌면서 몸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그 짧은 찰나, 나의 뇌 세포들이 안간힘을 쓰며 내게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보여주었다.
길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지는 나. 쪽팔림을 동반한 기절. 지나가던 친절한 런던 시민이 나를 발견. 911에 신고하여 그대로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호송. 정신을 차리니 왼쪽 팔에 꽂혀 있는 링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의료진. 전부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만 더 상황을 키우고 싶지 않아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 상태가 호전되어 링거를 뽑고 퇴원. 원무과를 가리키는 의료진. 마지막으로 내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인크레더블 병원비.
‘… 나 여행자 보험 없는데.’
자고로 순발력은 자본에서 나온다. 리퍼받을 돈이 없어야 떨어지는 핸드폰을 민첩하게 잡아챌 수 있는 거다.
바닥으로 기우는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뇌세포가 보여 준 미래를 막기 위해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어지럼증이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당장에라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와달라 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 데이터 키고 한국에 도와달라고 연락해 볼까?’
하지만 연락해봤자 당장 누가 런던으로 날라 오는 것도 아니었다. 괜히 상태 안 좋다는 얘기 해봤자 주위 사람들 걱정만 시키는 꼴이었다.
특히 가족들 귀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됐다. 개고생 말고 한국으로 바로 들어오라 할 게 뻔했다.
난 내가 시차 적응이 필요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누가 봐도 동양인이었지만 내 안에 유럽인의 피가 잠들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잠들어 있던 건 내 생활리듬이었다.
시차 적응을 하려면 어차피 둘 중 하나였다.
지금 자거나, 아니면 밤까지 버티거나.
현기증이 멈추는 것을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야 할 곳은 킹스크로스 역이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슈퍼마켓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큰 마트가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망설이지 않고 몬스터 2캔을 샀다. 더불어 고함량 카페인으로부터 빈속을 보호해줄 샌드위치도 함께 구매했다.
나는 몬스터 캔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휘적휘적 걸었다.
이런 좀비 생활은 대학 졸업과 함께 끝난 줄 알았는데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걸 보면 좀비 이즈 마이 라이프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진화를 해야 하는데 퇴화를 해버렸네...
킹스크로스는 마음에서 떠났다.
반쯤 풀린 내 눈앞에 표지판에 쓰인 ‘The British Museum’가 들어와 버린 것이다.
운 좋게도 마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영박물관이 있었다. 시간이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내가 알기로 대영박물관은 무료였다. 오늘 다 못 봐도 아쉬울 게 없었다.
대영박물관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구 밖까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슬그머니 줄 끝에 섰다. 내 뒤로 금방 아까보다 더 긴 줄이 이어졌다. 나는 남은 몬스터를 홀찌락홀찌락 마시며 입구 쪽을 살폈다.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박물관 입구가 작아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입구에 설치된 천막에서 직원들이 일일이 방문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었다.
그게 테러 때문이란 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막 주위로 방탄복을 입고 총을 든 무장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겪을 일이 없었다.
1년 전 영국의 옆 나라인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가 있었다. 나도 뉴스를 통해 접했다. 사람들은 희생된 피해자들을 애도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이후로 전 세계에서 IS의 테러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그건 남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테러도 IS도 전부 ‘내 일’이 되어 버렸다. 내일이 돼도 변하는 건 없었다.
직원은 가방 바닥에 깔려 있던 영수증 쪼가리까지 확인한 뒤에야 나를 통과시켰다. 단순한 업무였지만, 이 사람들은 다수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 하는 중이었다.
박물관 정원 분수대에 앉아 사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바로 옆에 상체만 한 총을 든 무장경찰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정원에 느긋하게 앉아 대화를 하고, 빵을 먹고, 사진을 찍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공포도 결국은 익숙해지는 걸까.
빈 몬스터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홀과 전시회장으로 이어지는 여러 개의 입구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힐 정도로 넓었다. 그래서 그냥 가까이 있던 입구로 들어갔다. 어차피 다 보면 되는 거니까.
고등학교 때, 대학에 간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선배는 미대에 진학했는데, 수업을 몇 번 들으니 깨달은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해외에서 살다온 사람들 감각은 못 따라잡는다고. 보는 시각과 사고 자체가 한국에만 있던 나와는 아예 다르다고.
대영박물관에 오니 그제야 그 말이 받아들여졌다.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외면하며 살았다.
환경부터가 달랐다.
무료로 고대 벽화부터 현대미술에까지 이르는 작품들을 매일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산 사람과 천편일률적인 입시 '기술'만 배우던 사람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감성도 다르고 시각도 다르고 삶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랐다.
그게 너무 분했다. 본인들 거도 아니면서 이런 예술적 환경을 누리고 사는 영국에게 짜증이 났다.
대영박물관 무료입장은 침입자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이었다.
열등감이라고? 맞다. 열등감이다. 누구는 국내에서 시간만 내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예술품들을 누구는 평생 보지도 못 한다는 불평등함에 화가 났다.
그래서 관람하는 내내 표정이 죽상이었다. 입 안이 쓰고 마뜩잖았다.
얘네 이거 돌려줄 생각, 아무래도 없는 거 같지?
폐장시간 가까이 관람하다가 터덜터덜 박물관을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왜인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지금 축구선수와 달리기를 해도 내가 이길 거 같았다.
그렇다. 카페인 과다복용 증상이다.
왔던 길로 되돌아갔으면 바로 지하철역이 나왔을 텐데 이성이 마비되고 판단력이 흐려진 나는 갈림길에서 ‘재밌어 보이는 길’을 선택해 들어서 버렸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17,477보짜리 런던 도보여행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