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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Oct 25. 2021

한국인이 오면 잘해주라던 유언


3일 밤샘+시차+몬스터 2캔의 위력은 굉장했다. 나는 브레이크 없는 불도저였다. 재밌는 간판이 있는 골목, 사람이 모여있는 가게, 공연 중인 광장을 찾아 들어가는 동안 지하철역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소호(Soho)에 도착했다. 소호란 이름이 익숙해서 생각해보니,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 갑자기 가슴 한 켠에서 내적 친밀감이 올라왔다. 그래, 소문은 많이 들었다. 얼마나 우중충한지 한 번 보자. 


소호 거리는 소설에서 묘사한 것과 완전히 달랐다. 

길 양쪽에는 명품관들이 늘어져 있었고 공연하는 예술가들과 관광객으로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내 생각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하이드가 와도 자기 집이 있던 자리는 못 찾을 거 같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갈아 끼웠다. 

그리고 흥미로운 거리 공연이 보일 때마다 군중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타 치고 노래하는 사람부터 와이어 없이 떠 있는 퍼포머, 터키 행진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까지…


관객들은 공연을 마친 예술가들에게 당연한 듯이 관람료를 지불했다. 이들에게 예술은 ‘누군가가 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식당처럼 자신의 삶과 밀접하고 가까운 것이었다.


잠깐! 여기서 문제!


이 중, 한국에서 예술하겠다고 했을 때 진절머리 나게 들을 수 있는 말을 고르시오. (5점)


① 공부하기 싫어서 예술하는구나.

② 난 그런 거 할 여유도 없는데. 부럽다.

③ 집에 돈이 많구나.

④ 배고픈 길 가네.

⑤ 그냥 취업해.


정답은, 두구두구두구. 5개 전부입니다. 짜짠.

그 외에 아깝게 보기에 오르지 못한 말로는 “그림 잘 그리네. 내 얼굴 좀 그려줘.”, “영화과니까 사진 잘 찍겠네. 나 좀 찍어줘.”, “연예인 얼마나 봤어?”가 있습니다.


내가 예술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공부하기 싫고, 집에 돈이 많고, 여유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이거 아니면 안 될 거 같았다.

이게 제일 하고 싶었고, 이거만 생각났고,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게 뻔했다. 내가 선택했지만, 실은 선택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 머리를 가득 채운 건 오직 이거 하나뿐이었으니까.


한국에서 예술은 ‘내가 하지 않는 것, 여유 있을 때 즐기는 것, 남들 안 하는 거 해서 사서 고생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오면서 들은 말들의 저의는 이랬다. 


삶이 예술과 가까운만큼 유럽인들은 예술에 돈을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품을 보고 돈을 지불한다는 것은 곧 인정받았다는 뜻과 같다. 


거리낌 없이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가치를 인정받는 경험. 


내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면, 불안을 가득 안고 떠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긴, 한국에서는 후려쳐지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후려치기 안 당하려고 동남아로 도망친 이야기는 앞으로 천천히 하겠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구경하며 다니다 보니 저 멀리 런던아이가 보였다. 그 옆에는 뾰족한 첨탑의 빅벤이 있었다. 


내가 꽤 멀리까지 걸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다리가 슬슬 아파왔다. 


마침 근처에 석상 몇 개가 세워진 작은 공원이 있었다. 잠시 그곳의 벤치에 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하늘의 색이 점점 짙어져 갔다. 반대로 런던아이의 붉은 조명은 더욱 빛났다. 


내가 앉아 있던 곳은 영국의 국방부 청사 앞 작은 공원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한국의 흔적을 발견했다.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는 남자 동상이었다. 발밑에는 두고 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꽃다발과 편지, 그리고 빛바랜 훈장이 놓여 있었다. 곰인형과 함께 놓여 있던 손편지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빠에게… 편히 잠드셨길 바라요. 아빠 매일 그리워하고 있어요.]


한국전 참전기념비였다. 알고 있다. 

정확히는 '알고는' 있었다. 전쟁이란 것은 절대로 한 나라의 문제로만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나는 이 여행에서 한국전과 관련된 인물들을 세 명 더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인물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미군이었다. 체격이 너무 좋고 건장해서 절대 한국전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나는 조부모와 가깝게 지낸 편이 아니라 옛날이야기를 들은 게 거의 없었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들은 과거 한국의 모습은 꼭 영화 속 이야기 같았다. 


두 번째 인물은 터키의 보드룸에서 지낼 때 묵었던 호스텔의 주인, 버락이었다. 버락의 할아버지도 한국전에 참전했던 터키군이었다. 그는 한국전에 참전했을 당시 북한군에게 붙잡혀 3년 동안 북한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버락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미 같이 게임을 하는 한국인 친구도 있었다.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깊었는지 “한국인은 왜 개고기를 먹느냐?”는 공격적인 질문에 그가 먼저 나서서 대답해주었을 정도다. 


마지막 인물도 터키인이다. 이스탄불에서 묶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오스카 아저씨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아저씨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유언으로 한국인을 만나면 잘해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오스카 아저씨는 게스트 하우스에 묵고 있는 여러 나라의 손님들 중, 한국인에게 유독 잘해주셨다. 

얼마나 잘해주셨냐면 지금도 아저씨의 친절을 생각하면 곧바로 코 끝이 시큰해질 정도다. 


한국전 참전 군인, 형제의 나라, 전쟁.


이런 것들은 그동안 나에게 텍스트에 지나지 않던 것들이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가치관을 바꿀 정도의 거대한 경험이란 것을 어리석게도 나는 너무 늦게 알아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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