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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Oct 21. 2021

낯선 여행지에서 익숙한 것 찾기


기약 없는 여행은 지루함을 동반한다. 


모든 도시에 관광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곳은 위험해서, 어떨 때는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에 숙소 밖으로 나가선 안 될 때가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생각만 많아진다. 모래알처럼 많은 생각들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사람들은 왜 해외에 왔는데도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로 가는 걸까?' 


컵에 이름을 적어줘서? 아니면 그 나라에서만 파는 굿즈가 있어서? 스벅 아니면 아이스커피 파는 데가 없으니까?


내가 나름대로 찾아낸 결론은 ‘익숙해서’였다. 


타지에 나가면 새로움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지만 동시에 낯선 곳에 대한 긴장감이 따라붙는다.


스타벅스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메뉴, 맛, 음악, 심지어 인테리어까지 비슷하다. 부다페스트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실 때와, 신사역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실 때의 경험이 큰 차이가 없는 거다. 


해외 스타벅스를 방문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만이라도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며 쉬고 싶은 마음인 거다. 


참고로 나는 이 내용을 면접 때 그대로 풀어내어 스타벅스에 무사히 입사했다. 회사에서 듣기에도 꽤 그럴듯한 가설이라 통과시킨 것 같다.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니 이미 눈치챘겠지만 지금은 스타벅스를 다니고 있지 않다.


갑자기 이 얘기를 왜 꺼냈냐면, 포토벨로 마켓에서 예기치 못 하게 한국의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다.



포토벨로 마켓에는 벚나무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았다. 나는 런던에서 벚꽃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 했다. 


3월은 쌀쌀한 바람과 따뜻한 햇빛이 손잡고 한 해를 잠에서 깨우는 시기다. 런던은 한국처럼 햇빛이 따사로운 지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벚꽃은 제가 피어날 때를 알고 거리를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순식간에 머릿속은 벚꽃나무 아래에서 보낸 지난날들로 가득 찼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며 소원을 빌던 날, 캠퍼스에 가득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친구들과 단체 사진을 찍었던 날, 아직 덜 핀 벚꽃 나무 아래에서 어떻게든 만개한 꽃을 찾아보려 기웃대던 나… 


카메라를 꺼내 런던의 벚꽃을 담았다. 

그렇게 벚꽃에 대한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의자에 앉아 있는 건 인형이 아니라 진짜 푸들이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적당한 카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포토벨로 마켓 입구 쪽에 정원이 있는 넓은 식당 겸 카페가 있었다. 문 앞에 세워 놓은 메뉴판을 쓱 훑어보니 가격도 괜찮았다. 


가게는 식당 구역, 카페 구역을 나누어 운영 중이었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카페로 운영되는 공간 한쪽 테이블에 앉았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사실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이곳은 영국에 도착해서 내가 방문한 ‘첫 가게’였다. 이제 나는 원하는 메뉴를 ‘실수 없이 영어'로 주문해야 하는 거대한 미션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블랙 커피를 마실 거라고 들어올 때부터 정한 상태였지만, 고민하는 척 메뉴판을 천천히 넘기며 메뉴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차마 테이블 위에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올려 놔준 직원의 성의를 헛되게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손을 드는 것은 유럽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유튜브’에서 배웠다. 눈이 마주친 직원이 다시 또 친절한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유튜브’에서 배운 영어를 그대로 구사했다. 


“Um… Can I get a coffee please?” 


무사히 주문을 끝마치고 카페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포토벨로 마켓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애들은 그제야 내가 정말 유럽에 있는 게 실감 난다며 신기해했다.


커피를 마시며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다이어리에 적고, 그림으로 남겼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쓸 수 있었던 것은 세세한 것 하나까지 기록해두었던 과거의 나 덕분이다.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더니 잔뜩 혹사당했던 다리가 서서히 기운을 차렸다. 커피잔도 바닥을 드러냈고, 슬슬 다른 곳을 구경하고 싶어졌다.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 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다시 찾아 온 미션~ 타임~ 빠밤.


 ‘...팁을 줘야 하나?’ 


팁 문화가 있는 나라는 여기가 처음이었다. 영화에서 보면 팁 때문에 서로 감정 상하는 일이 허다하던데.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선 안 됐다. 


‘준다면 얼마나 줘야 하는 거지? 보통 10프로를 준다는데 그럼 나도 그 정도? 근데 이거 커피 값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만큼 줘도 되는 거야? 혹시 커피 값에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골머리를 싸매며 혼자 10분을 고민했다. 


비겁하지만 나는 선택을 직원에게 맡기기로 했다. 

알아서 팁까지 계산해주길 바라며 직원에게 계산서를 내밀었다. 


“저, 혹시 카드 계산되나요?”



하이드 파크 주변을 걷다가 문득 2층 버스를 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해둔 목적지가 없었다. 


하지만 아는 데는 있었다. 바로 킹스크로스였다. 

거길 가면 9와 4분의 3 승강장으로 들어가는 해리의 반쪽짜리 캐리어가 있었다. 영국에 왔으니 해리포터 한 번은 봐야할 거 아닌가.


길에서 얕은 와이파이를 하나 잡아 구글 지도를 켰다. 그리고 지도가 가리키는 곳의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타이밍 좋게 도착한 빨간 2층 버스에 몸을 싣고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맨 앞 창가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들었다. 누가 봐도 관광객스러운 촌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알 게 뭔가. 그정도로 남의 시선 의식하고 사는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현실이 무섭다고 유럽으로 도망치지도 않았다.   


창가에 기대 움직이는 버스를 따라 바뀌는 런던의 전경을 구경했다. 봐도 봐도 아직은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다. 미디어에서 봤던 모습들이 내 눈앞에서 라이브로 재생되고 있다는 게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런던은 듣던 대로 날씨가 흐렸다. 어딜 가나 해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무채색 옷을 즐겨 입었다. 


이 도시에 있는 모든 것들이 런던이 품고 있는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런던의 풍경 사진에서 빨간 2층 버스가 눈에 띄던 이유가 있었다. 걔는 이곳에 몇 없는 원색깔 오브제였다. 


유리창에 머리를 붙이고 한참을 창문 밖의 사람과 비둘기와 건물과 자동차를 구경했다. 



그러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다. 사실 나는 심하게 멀미를 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한국에서도 버스는 잘 안 탄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이미 킹스크로스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런던은 영국의 수도라는 것. 그 말은 얘네도 차가 겁나게 막힐 거라는 거.


'한국에서 안 하는 짓은 외국 나가서도 하지 않는다'는 게 가 내 원칙이었는데 그만 2층 버스에 홀려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 앉아 있다가는 진짜 못 볼 꼴을 보일 거 같아서 급하게 벨을 눌러 가까운 정류장으로 뛰쳐 내렸다. 


버스에서 내렸다는 안도감도 잠시,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눈앞이 핑 돌았다. 중심을 잃고 온몸이 앞으로 쏠려 넘어질 뻔했다. 


빌어먹을 시차가 이제야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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