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도권 밀집화 현상이 싫다.
맞다. 서울은 내 고향이 아니다. 아무리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살고 있다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본가에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청년들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건 또 항상 내 얘기다.
비수도권 인간의 열등감이라 말해도 할 말은 없다. 솔직히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니까.
높은 주거비용 지출에 가정이 무너지고 인간관계가 흔들리고…
언제쯤 사회 뉴스 통계치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졸업 후 나는 본가로 돌아왔다. 어차피 알바하면서 돈 모을 거 월세라도 아끼는 게 좋으니까.
주말마다 내려오기도 했었지만 완전히 다시 내 어린 시절의 방으로 돌아왔다는 건 기분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엄마는 내가 『한국인의 인생 정석 : 의무교육 - 대학 - 취업 - 결혼 - 육아』 의 루트대로 살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엄마, 나 수포자야. 수학의 정석도 펴본 적 없는데 어떻게 코리안 스탠더드 라이프대로 살겠어. 그걸 바랬으면 일단 내가 예술하겠다고 방바닥에 드러누웠을 때부터 코브라 트위스트를 먹이며 말렸어야지.
엄마는 떼어낸 줄 알았던 혹이 다시 돌아오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차마 사회에서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 안전하다고 생각한 가정으로 도망쳐 온 거라고 엄마에게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엄마, 엄마가 밥 잘 먹여서 키운 딸내미... 실은 동년배 중에서 제일 쫄보야. 장학금? 그거 다 뽀록이었어.”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식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연히 엄마는 내 속도 모르고 집에 온 날부터 유럽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블루투스 마이크를 켜고 취업취업 노래를 부르셨다.
그래서 엄마와 엄청 싸웠다.
다른 집들은 부모 자식끼리 어떻게 싸우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집은 목소리 크고 뒤끝 긴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새삼 옆집에서 경찰에 신고 안 한 게 신기하다.
당연히 유럽으로 떠나기 전 날에도 엄마와 싸웠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무사히 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여정을 앞두고도 엄마와 나는 자존심밖에 없는 싸움을 이어갔다.
엄마는 나를 꺾으려 할 때마다
“나중에 결혼해서 꼭 너 같은 자식새끼 낳아 키워봐라!”
라고 하셨다.
말이 나왔으니 이 자리를 빌려 이야기해 본다.
엄마... 친구들이 그러는데, 나 엄마 많이 닮았대. 특히 성격이... 엄마만 모른다 그거?
불효자 아들이 가장 효자가 되는 시기가 군 복무 기간이라던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을 떠나 앞이 깜깜한 여행길을 시작하니 갑자기 20년간 잠들어있던 효심이 깨어났다.
그날, 베이징 공항 카페에 있던 중국인들은 매장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앉아 일기장을 붙잡고 별안간 눈물을 흘리는 외국인 여성을 목격해야만 했다.
‘내가 엄마를 너무 힘들게 만든 거 같아…’
후회의 문장만 가득한 일기장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방울은 잠시 고여 있다가 천천히 종이 안으로 스며들어 일기의 한 부분이 되었다. 검은색 글자는 보랏빛을 띠며 사방으로 번져갔다.
넘치는 감정을 억누르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덜 쪽팔려 보려고 훌쩍거리는 얼굴을 테이블 위로 박았다. 그리고 냅킨으로 교양 있게 콧물을 훔쳤다.
조금 진정된 뒤에 머쓱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새 손님이 좀 빠져있었다. 비행기 탈 시간이 된 사람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찻잔에 가득 차 있던 커피도 바닥을 드러냈다. 나도 더 앉아 있기 민망해져 슬슬 자리를 정리했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노숙하기 적당한 곳을 찾았다.
이전 일본 여행 때도 귀국 날짜를 하루 착각하는 바람에 공항에서 잔 적이 있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는 아예 공항 노숙을 위한 간이침대 공간도 있었다. 그때는 나처럼 하룻밤 노숙해야 하는 여행객들도 꽤 보였다. 덕분에 동지애를 느끼며 맘 편히 두 발 뻗고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 국제공항은 달랐다. 간이침대는커녕 공항 내 의자 개수부터 적었다. 아예 처음부터 노숙할 수 없도록 설계해 놓은 거 같았다.
나는 엄마와 자존심만 걸린 싸움의 후유증으로 이미 밤을 새우고 온 상태였다.
벌써 이틀째였다. 더 이상 잠을 미룰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안 그러면 <해외 응급실 체험을 통한 대한민국 건강보험의 소중함과 애국심 상승효과에 대하여>란 논문 자료 조사를 직접 해버릴 판이었다.
시계는 새벽 3시 반을 가리켰다. 한참을 헤매다가 굵은 기둥을 빙 둘러싼 원형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반대쪽에는 이미 중국인 아저씨가 몸을 뉘어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아저씨의 발 밑에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몇 시간 뒤, 그가 타고 가야 할 게 분명한 비행기 티켓이 널브러져 있었다. 뒷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그의 대담한 성격에 기가 막혔다.
아저씨와는 반대로 나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였다.
나는 제일 먼저 목숨만큼 소중한 DSLR 카메라가 든 가방을 가슴에 품고 누웠다. 누가 빼가지 못하도록 가방끈을 손에 둘둘 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울퉁불퉁한 배낭 위에 스카프를 깔고 누웠다. 이렇게 하면 내 짐을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눈치채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틀 만에 뒤통수가 바닥에 닿았다. 단지 그뿐인데도 몸과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앞으로는 환승할 때 무조건 경유 시간 짧은 걸로 선택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서히 내 눈꺼풀 위로 잠이 덮이는 걸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리던 작은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공항을 꽉 채워버렸다. 조용하던 새벽은 순식간에 야구공에 맞아서 깨진 창문처럼 와장창 부서졌다.
소음보다 더 불편했던 건 감긴 눈 위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이상했다. 분명 이 공항에는 방금까지 50명도 없었는데.
‘뭐지? 사고라도 났나? 비행기가 갑작스럽게 비상 착륙이라도 한 건가? 공항에 테러 예고가 떨어졌나?’
나를 쳐다보는 눈빛들을 향해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로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접착제로 붙인 거처럼 꽉 감긴 눈꺼풀 사이를 천천히 벌렸다.
난 내가 졸도해서 6시간 뒤에 깨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겨우 한 시간이 지나있었을 뿐이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여행객들이 공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골프장처럼 곳곳에 삐죽 튀어나온 깃발 주위로 몇십 명씩 모여 있었다.
여행의 설렘이 사람들의 표정을 타고 목소리로 뻗어나가 공항 전체를 웅웅하게 울렸다.
중국의 인구수가 세계에서 제일 많다는 정설을 내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무리 지나가던 사람 붙잡고 ‘안녕하세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찾고 있던 이미지십니다. 제 작품에 출연해주실 수 있으실까요.’를 남발할 만큼 뻔뻔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수 백명의 시선을 느끼며 노숙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자는 걸 포기하고 얼레벌레 공항을 좀비 꼴로 돌아다니다가 항공사가 열리자마자 티켓팅을 마치고 입국심사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이전 글에 썼듯이 그곳에서 소중한 피카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인생이란 새옹지마라고 한다.
아무래도 내 말은 적토마가 분명한 것 같다. 한 번 떠날 때마다 압록강을 건너 아랍에미리트까지 달려간 건지 집 나가면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내 말이 중동 간 건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와의 싸움, 불안정한 여행에 대한 걱정과 우려,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로함, 빼앗긴 피카츄에 대한 분노로도 모자랐는지 비행기 안에서까지 사건은 일어났다.
비행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내 생각보다 더 넓고 쾌적했으니까. 이코노미석이라 다리 쭉 뻗고 갈 만큼 편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피곤한 몸을 구기고 새우잠을 잘 만큼은 됐었다. 기내식 때문에 중간에 한 번씩 깨다 보면 금방 런던에 도착할 거 같았다.
의자 뒷머리마다 붙어 있는 모니터에는 다양한 영화와 그림퍼즐 맞추기 같은 킬링 타임용 게임도 있었다. 영 잠들기 힘들면 그걸 보며 시간을 보내도 될 거였다.
그런데 그 모니터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날 내 뒷자리에 탔던 인도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은 컨디션이 최고조였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베이징에서 런던까지 가는 비행 내내 잠을 안 잘 수가 없으니까.
남자도 처음에는 얌전히 영화를 봤었다. 시간이 지나고 승객들과 나의 머리 위로 수면 가루가 솔솔 뿌려지기 시작할 때… 남자는 게임을 시작했다.
그렇다. 모니터에서 제공하는 그림 맞추기 퍼즐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인종차별을 당하는 줄 알았다.
해외에 나왔는데 뒤에서 외국인이 비행 내내 의자 머리 부분을 툭툭 쳐댄다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 유럽 땅 밟기도 전에 시작되어 버렸구나.’
나는 노려보는 눈알을 장착하고 뒷좌석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당연히 나를 의식하고 맞받아치며 노려볼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표정도 꽤 진지했다. 집중한 표정만큼 그의 검지 손가락이 힘차게 스크린을 두들겼단 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곧 남자가 인종차별이 아니라 기내에서 제공하는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이걸 말을 해, 말어? … 근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는 불만사항을 상대에게 점잖게 말할 만큼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삿대질하며 한국어로 쌍욕을 날렸다면 대충 감정 전달은 됐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내게 전달되는 건 높은 확률로 주먹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내가 끈질기게 계속해서 몸을 돌려 쳐다봤음에도 한 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으니까.
그의 눈은 언제나 내 좌석 머리받이 쪽의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국인이었으면 아직 안 늦으신 거 같으니 서울대 한 번 노려보라고 어쭙잖은 조언까지 해줄 뻔했다.
그렇게 3일 밤을 꼬박 새워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예민함이 흐린 런던 하늘을 찌르고 맑은 성층권에 닿았다.
그러나 그걸 입국 심사대에서 드러낼 순 없었다.
귀국행 티켓이 없으니 입국 거부당할 수 있다는 말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인천에서는 여행의 두려움으로 그것도 괜찮지, 라며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근데 막상 개고생 해서 도착하니 이렇게 추방당하면 억울할성싶었다.
탕수육도 아니고 여행을 찍먹으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떡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쓰고 있던 검은색 캡 모자부터 벗었다. 그리고 면접장에 들어가는 취준생 같은 눈빛으로 반짝거리며 입국 심사대 직원과 마주 섰다.
나의 진정성 담긴 눈빛이 비행기 뒷좌석의 남성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이 직원에게는 먹히길 바라면서.
‘나는 이 나라에서 불법 체류자가 될 생각이 1도 없습니다.’
이번에도 출입국신고서에 ‘학생’이라고 거짓말을 쳐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3일간 못 감은 머리를 하고 무직이라 적을 순 없었다.
“영국에는 얼마나 있을 예정입니까?”
“2주 반이나 3주 정도요.”
“영국은 처음인가요? 친척이나 친구가 거주 중입니까?”
“아뇨, 없습니다. 처음입니다.”
“영국 어디 어디에 갈 예정인가요?”
“런던 시내, 시내에만 있겠습니다.”
“학생이군요. 전공이 뭔가요?”
“영화입니다. 영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 멋있네요.”
“감사합니다.”
우려와 달리 직원은 별다른 리액션 없이 내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는 끝까지 취준생 미소를 유지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조용히 심사장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메인 스테이지인 유럽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