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이 여행에서의 첫 번째 외국이다.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들과 함께 짐을 찾았다.
보통은 환승하는 곳에서 짐을 되찾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천공항에서 티켓팅 할 당시, 항공사 직원이 분실 위험이 있으니 경유지에서 한 번 가방을 찾는 것을 권했었다. 비행기 환승은 이번이 나도 처음이었고, 분실로 인한 돈 낭비를 하고 싶지 않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쯤에서 경유지에서 수하물을 찾게 되는 경우 겪을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적어 보겠다.
아, 물론 모든 것은 ‘이용객’의 관점뿐인 나의 주관적인 의견이다. 항공업 관계자나 각각 나라의 공항 사정에 따라 내가 말한 장점과 단점은 달라질 수 있다.
장점으로는 항공사 직원의 말대로 수하물 분실에 대한 위험이 적어진다. 의외로 장거리 여행 시 캐리어가 분실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비행기 이용 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사고에 관해 잘 모르던 시절에는 ‘그냥 이 비행기에 있던 짐을 저 비행기로 옮기면 되는 건데 뭐가 그렇게 어렵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
중국처럼 이용객이 많은 나라거나, 저가 항공을 이용할수록 분실 확률은 높아진다. 여행 커뮤니티 카페를 살펴보다 보면 최소 주에 한 번씩은 분실 고민 글들이 올라온다.
어찌 됐든 찾게 되면 다행이지만, 가방을 다시 돌려받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보통 일주일 이상이었고 운이 나쁘면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거기에 분실한 항공사 직원들의 불친절한 서비스까지 더해지면 그 여행은 시작부터 완전 꼬여버리는 거다.
이런 리스크까지 생각한다면 안전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여행을 위해서는 중간에 한 번 수하물을 찾는 게 확실히 좋다.
장점으로 밑밥을 깔았으니 지금부터는 단점을 이야기해보겠다. 보통 사람은 본론을 가장 마지막에 말한다고 하던가. 안타깝게도 중간에 수하물을 찾는 행동은 곱슬머리 내 동생처럼 장점은 하난데 단점은 여러 개다.
첫 번째 단점으로는 환승할 때까지 그 짐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거다. 나는 기내용으로도 쓸 수 있는 7kg짜리 소형 캐리어였는 데도 몇 시간 동안 공항에서 끼고 다니는데 아주 귀찮아 죽을 뻔했다.
자고로 경유지라 하면 느긋하게 숨 한 번 크게 쉬고 “아~ 이게 이 나라 공기 냄새구나~” 하고는 그 나라 공항 구경도 좀 하고, “얘네는 뭐 먹고사나~” 하며 밥도 좀 찾아 먹어 보고, 소파에 누워 불편하게 쉬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놈의 캐리어 때문에 뭐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더랬다.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은 꼭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나 또한 고국을 떠나 타국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사회화되어 잠들어 있던 내 안의 쌈닭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생활했다가는 눈 깜짝할 새에 소지품 다 털리고 개털 돼서 길가에 코 박고 떨어진 동전 찾아 주워다가 공중전화로 대사관에 전화 걸어서 눈물 콧물 짜내며 살려달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여행 내내 긴장한 거북이 상태로 유일한 재산, 등껍질 같은 가방을 사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계속 캐리어를 신경 쓰면서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다는 건 생각보다 여간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다.
이후로는 경유할 일이 생길 때마다 귀중품은 전부 기내용 배낭에 담고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캐리어에 넣어 보내게 되었다.
두 번째 단점으로는 짐을 찾게 되면 환승객이 이용하는 게이트가 아닌 출구용 게이트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환승 라운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공항에서 환승객들을 위해 준비한 호텔 예약 서비스는 물론이고 무료 와이파이와 조금 불편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소파가 있는 공공시설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마지막은 다시 출국을 위해 짐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별로 대부분 기내 탑승 시 반입 가능한 제품 리스트는 비슷하다.
그런데 15번 중 한 번 꼴로 미묘하게 다를 때가 있는데-이 통계는 오로지 내 경험에 의한 통계다. 지금까지 30개 좀 넘는 나라를 가봤는데 이런 경우를 딱 2번 보았다-운이 나쁘면 예상치도 못 한 물건이 금지품목이 되어 압수당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그런 건 나한테 일어난다.
나는 베이징 공항에서 내 ‘한정판 피카츄 보조 배터리’를 빼앗겼다.
보조 배터리. 스마트폰 배터리 일체화가 만들어낸 창조 경제 중 하나.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수품이나 나름 없는 물건. 그리고 이제는 물건에 적혀있는 하나의 마크나 마름 없는 ‘MADE IN CHINA’.
이제와 보니 이 모든 게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복선처럼 느껴진다.
2016년 여름, ‘포켓몬 고’가 출시되며 전 세계가 피카츄 100만 볼트에 맞은 거처럼 이 가상현실 게임에 강타당했다. 나 또한 남들 하는 거는 다 하려고 드는 성향인지라 속초에 가서 야생 포켓몬 몇 마리를 잡아 오기도 했었다.
포켓몬 코인을 타보겠다는 의지인지 그해 겨울, 롯데리아에서는 포켓몬스터 콜라보 제품을 출시하였다. 피카츄 얼굴과 몬스터 볼 모양의 보조 배터리였는데 햄버거 대신 굿즈 장사를 해도 될 정도로 제품이 예쁘게 나왔다.
나는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로 롯데리아를 몇 년 만에 방문하여 피카츄 한 마리를 분양받아 왔다.
너무 예쁘고 소중했기에 한국에 있는 동안 아끼고 아끼고 또 아껴 쓰다가 유럽여행을 떠나는 배낭 안에 고이 넣어 태초마을 최고의 아웃풋 지우가 된 거처럼 함께 모험을 떠났다.
그런데 그 피카츄가 중국의 수하물 검사대에 걸려버린 거다.
다들 의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조 배터리는 기내 반입 가능 물품이니까. 당연히 한국에서 짐을 챙길 때 반입 가능한 용량이란 것도 확인했었다.
한국에서 떠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던 녀석이었는데, 베이징 공항 검사대의 직원은 이건 통과 불가 제품이라며 그 이유로 피카츄 등 뒤에 적혀 있는 배터리 용량을 가리켰다.
“NO WH.”
“WH?? What is the WH??”
안타깝게도 그곳에 있는 중국 직원들 중 누구도 내게 WH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했다. 아마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 영어가 익숙하지 않거나, 본인들도 WH가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갖고 있던 보조 배터리는 그게 유일했고, 게이트 앞에서 충전할 생각에 핸드폰을 펑펑 쓰는 바람에 배터리도 30%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내 피카츄는 외로움을 많이 타서 데리고 가야 한다며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활한 여행을 위해서 여행객이 공항에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알겠습니다.” 하나뿐이니까. 배터리 때문에 돈 주고도 하고 싶지 않은 중국 공안 조사 체험을 할 수는 없었다.
피카츄는 파란색 바구니에 담겨 내 눈앞에서 다른 반입 금지 품목들과 뒤섞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사라지는 직원들의 등을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야 도대체 WH가 뭐냐, 응?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니냐. 니네 그 배터리 어디서 만든 줄 아냐. 메이드 인 차이나다, 차이다. 니네 나라에서 만들었는데 니네 나라에서 문제라고 하면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너무 속상해서 게이트 앞 의자에 앉자마자 일기장을 꺼내 일기를 썼다. 당연히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일기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셀프 선물로 산 피카츄와 이별하게 될지는 몰랐다.
그렇게 나의 피카츄는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중에 알아보니 WH는 배터리 용량을 표시하는 또 다른 단위였다. 내 배터리는 4000mAh였고, 이걸 WH로 변환하면 대략 17-18WH정도가 된다. 중국 기내에 휴대 가능한 보조 배터리 용량은 160WH까지이므로 기준치에 현저히 미달되는 양이다.
하지만 단지 표시단위인 ‘WH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녀석은 반입 금지 물품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메이드 인 차이나면서 쟤는 왜 WH가 적혀있지 않았는지 의문일 뿐이다. 샤오미는 다 적혀서 나오던데.
혹시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있나 검색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례가 있는 걸 넘어서 기사화까지 된 상태였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이후 홍콩과 마카오를 다녀오긴 했지만 그때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알아서 보조배터리를 빼놓고 갔었으니.
지금 이 글을 쓰며 검색해보니 나처럼 중국 공항에서 같은 이유로 보조 배터리를 빼앗겼다는 글은 전부 2017년까지 뿐이다.
어쩌면 이것도 저 시기에만 겪을 수 있었던 ‘상황’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베이징 공항에서의 놀라운(긍정적으로 표현해서) 경험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여자들과는 ‘안전하게 여행 마치세요.’라는 간절한 인사말로 헤어졌다.
그리고 촬영 나온 연예인 구경하는 시민처럼 공항 내의 카페들을 기웃기웃거렸다.
나의 환승 텀은 9시간이었다. 일일 수면시간에 맞먹는 대기 시간 동안 시간을 죽일 곳을 찾아야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중국 공항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입국 심사 대기 시간만 4시간이 걸렸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잔뜩 쫄아 있었는데 의외로 공항은 굉장히 한산했다. 게다가 대륙의 크기에 비해 베이징 공항 내에 입점해 있는 가게들의 수도 적었다.
여기가 백화점인지, 공항인지 헷갈릴 거 같은 인천 공항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제일 먼저 만만한 스타벅스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그곳은 이미 끼어 들 틈 하나 없는 만석이었다. 몇 분간 멀찍이 서서 지켜봤지만 다들 몇 시간 동안 멍 때리고 있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인 거 같았다.
몸을 돌려 건너편의 카페로 향했다.
[LEI CAFE]라고 적혀 있는 카페는 테이블도 다양하고 꽤 큰 편인 거에 비해 이용객이 적어 한가했다. 커피 가격은 일반 블랙커피 기준으로 25위안. 한화로 4,500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한국에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도 4,100원인데 중국에서 이 돈 주고 커피를 사 먹으려니 솔찬히 마뜩잖았다. 중국이 다른 건 몰라도 음식 값은 저렴하다고 했던 친구들의 말은 다 뻥이었는가. 아니면 여기가 공항이라 비싼 건가.
어쨌든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카페 내 손님들을 살폈다. 대부분 중국인으로 보였는데 소파 쪽 자리는 이미 꽉 차서 먼저 온 사람들이 몸을 뉘어 선잠을 자는 중이었다. 가방을 옆에 늘어뜨리고 자는 모습을 보니 참 속편해 보여서 부러웠다. 중국이어도 말 통하는 자국 내라 저렇게 긴장을 풀고 있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커피를 마시며 SNS 좀 하며 시간을 보내려 했더니 와이파이가 연결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모두 접속하지 못하였다. 흰 화면을 몇 번이고 새로고침 하다가 뒤늦게야 이게 말로만 듣던 SNS 검열이란 걸 깨달았다.
솔직히 그제야 내가 중국에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21세기식 시간 보내기 대신 20세기 시간 보내기 방법을 택했다. 나는 가방에서 일기장과 그림 연습장을 꺼냈다.
이때 썼던 일기와 그림들은 다음 편에 첨부하겠다. 아무래도 워낙 새벽 감성이었던 지라 약간의 필터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쓸 일 없던 와이파이는 커피를 서빙해주는 직원을 붙잡고 물어 연결하는 법을 알아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청년이 와이파이 하나 혼자 연결하지 못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공항 와이파이 인증 방법에 비행기 티켓을 이용하는 게 있었는데, 좀처럼 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원이 알려준 방법은 핸드폰 번호로 인증하는 것이었다.
개인정보가 여기저기 뿌려지는 게 싫어서 어떻게든 티켓으로 인증해보려 했던 건데 직원도 핸드폰 인증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
나는 베이징 공항에서 와서 두 번째로 마뜩잖은 기분을 느끼면서 직원의 친절에 고개를 끄덕인 후 인증 창에 내 번호를 적었다.
하지만 뭐든 처음이 어렵다고. 내 핸드폰 번호는 현재 100여가 넘는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이 정도면 거의 개인정보를 수출하고 온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