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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l 30. 2021

인천공항에서 가장 죽상인 사람

2017년 3월 9일. 

그날 인천공항에 도착한 한국인 중 내가 제일 죽상이었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마 그날 수출용으로 나가는 동태 눈깔이 내 눈보다 또렷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일 수는 없다고. 비겁하게 도망친 인간이 갖는 죄책감은 내 어깨를 짓누르는 걸로 모자라 바짓가랑이까지 붙잡고 끈질기게 늘어졌다.

거기다 계획 없이 끊은 인천발-베이징 경유-런던 도착 편도행 티켓이 7kg짜리 캐리어를 70kg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여행 당사자인 나조차도 내가 언제 한국으로 되돌아 올 지 알 수 없다는 상황에 숨이 막혔다. 


“이러면 입국 거부당할 수도 있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 핑계로 한국에 다시 오면…’


항공사 직원이 이 자리에서 귀국행 티켓을 끊으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당장 편안하고 안락한 침대 속으로 몸을 던져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귀국할 날짜를 정해라, 라는 말은 이 여행을 ‘여행’으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처럼 들렸다.


“… 아뇨, 괜찮아요. 그대로 갈게요.”

“그러면 여기 서명 좀 해주시겠어요? 거기 서명서 좀 가져다줘.”


항공사 직원이 옆에 있던 다른 직원에게 ‘서명서’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작년의 동남아 배낭여행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도 입국행 편도 티켓 하나만 끊고 인천공항을 찾았더랬다. 당시의 편도행 티켓은 단지 첫 장기 배낭여행에 대한 나의 로망 중 하나였다. 하지만 티켓팅 단계에서 ‘입국 거부’라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나는 곧바로 “이 날짜로 귀국하는 거로 할게요.”라면서 현실과 타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로망 같은 게 아니었다. 나는 1년 전과 같은 질문에 다른 선택지를 적어냈다. 


‘입국 심사대에서 입국 거부당할 시 항공사 측에 아무런 이의 제기하지 않겠다.’    


기내용 배낭을 들쳐 매고 여권과 티켓 확인을 한 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수하물 검사를 기다리는 줄의 끝에 섰다.


‘치약, 화장품, 면도기… 다 캐리어에 넣어 보냈지?’  


2년 전, 처음으로 혼자 갔던 해외여행지인 대만에서 나는 다양한 과일주들을 만나고 눈이 돌아버렸다. 당시 한국에서는 소독약 냄새 같은 독주의 틀에서 벗어나 겨우 달달한 과일 소주들이 하나둘씩 나오던 때였다. 맛있는 술에 꽂혀 있던 나는 대만의 마트와 편의점에서 과일 맥주를 발견하고는 솟구쳐 오르는 물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방의 반을 맥주로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귀국하는 날 아침에 일어나서 먹겠다며 미리 맥주 한 캔을 빼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예상 시간보다 늦게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나의 소중한 파인애플 맥주는 캔 따는 소리도 못 내고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졌었다.


그때의 후회는 생각보다 오래갔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차가운 철제 쓰레기통에 누운 그 녀석을 생각하면 눈가가 뜨거워진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반복해서 배낭 속 짐 리스트들을 읊었다. 문제 될 건 없었다. 가벼운 옷가지와 카메라 그리고 그림과 메모를 위한 크로키 북과 다이어리, 필통이 전부였다. 

수하물 검사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보안 검색대도 무난하게 통과했다. 이제 레일에서 빠져나오는 배낭을 기다렸다가 면세점으로 향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보안 검색 요원은 내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 구석까지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난 여행에서는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 정신은 이번이 더 가까웠는데도 말이다!


‘뭐지? 뭐가 문제지? 내가 뭘 넣어 놨었지?’


지난 여행들을 통해 익힌 ‘여행자를 위한 팁’ 중 하나를 써먹을 때였다.


‘낯선 상황 속에서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하면 최대한 얼굴에 티를 내고 주변 사람들을 쳐다봐라!’


물론 이런 표정을 지어도 얕보이지 않을 상황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보통 이렇게 행동하면 아직 세상이 내 생각만큼 쓰레기는 아니란 걸 증명하듯이 어디선가 도움의 손길이 뻗어오기 마련이었다.

이번 경우에는 보안 요원들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봐야 했다. 그리고 내 가방과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스러움을 표현하는 액팅을 극대화시켰다.  


직원이 내 가방에서 배트맨 마크가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노란색 필통을 꺼냈다. 혹시 문제가 생길까 커터 칼 같은 위험한 물건은 애초에 챙기지도 않았었다. 직원은 내 필통 안의 펜들을 꼭 사려는 사람처럼 하나씩 눌러보며 체크하기 시작했다.


“학생이세요?”

“…네.”


작년까지는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뭐 재학증명서 떼와서 검사할 거도 아니고. 대학에 나이가 어딨냐 싶어 문제없이 무난하게 통과될 거 같은 대답(구라)을 했다.


보안 직원은 모든 펜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내 짐을 되돌려 주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나는 이 낯선 상황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 필통은 지난 배낭여행 때도 들고 갔었던 데다가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평범한 필기구 몇 자루 때문에 보안 검색대에 걸려 검사받게 될 거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때 한창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죄 사건의 기사 타이틀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남 암살, 살상 무기는 독침 펜?>


지금이야 살해 도구가 독침이 아니란 게 밝혀졌으나, 당시에는 모든 것이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그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내 하이테크 펜과 모나미 제도 샤프는 공항 검색대에서 꼼꼼하게 검사해야 하는 위험 품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면세점에 들어서서 입구에 위치한 스타벅스를 보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무거운 발걸음이 시작부터 난항이라는 불안한 징조 때문에 더 천근만근이 되었다. 어깨에 맨 배낭도 승모근을 파고드는 거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기분전환을 해보겠다고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나의 불안이 전염된 건지 친구들도 이 여행의 시작을 걱정 가득히 지켜봐 주고 있었다. 그중 송민진이란 친구가 메시지와 함께 스타벅스 기프트 카드를 보내주었다.


[네가 가는데 왜 내가 마음이 심란했는지 모르겠어. 공항에서 먹어.]


“소이 라테 톨 사이즈 한 잔이요.”


친구가 준 기프트 카드로 결제를 하고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이내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다시 한번 오늘처럼 공항에서 소이 라테를 마셔야지. 그리고 민진이에게 이 여행의 시작과 끝에 네가 보내 준 소이 라테가 있었다고 말해주는 거야.’


한 발자국 뗄 때마다 돌이킬 수 없는 곳을 향해 한 발씩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굉장히 센치하고 감정적인 상태였다. 그 상태가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얼마 안 있어 됴륵,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정택운이 나타났다.


정택운이 누구냐, 하면 ‘다칠 준비가 돼 있어’라는 무대를 보고 꽂혀 버린 후 내 두 눈으로 무대 한 번 보겠다고 몇 년 전 방학 때 행사를 쫓아갔던 그룹 ‘빅스’의 메인보컬 ‘레오’였다.


‘세상에.’


전화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그를 입을 떡 벌린 채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치 게임에서 힐러가 힐링을 해주고 간 거처럼 정서적, 체력적 컨디션이 모두 회복되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은 매고 있는 느낌도 안 들만큼 가벼워졌고-과장 하나 없지 진짜 그렇게 느껴졌다-마치 내 앞에 펼쳐질 안개 같던 미지의 여행이 어찌 됐든 무사히 끝날 거라는 낙천적인 결말로 뒤바뀌었다.


사실 팬이라며 사진을 찍어달라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스케줄 중이 아닌 이상 전부 사생활이나 다름없으니 그저 아련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길쭉한 뒷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게다가 이미 내 다이어리에는 다른 아이돌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다. 나는 혼자 흥얼흥얼 행복 회로를 돌리며 가뿐한 걸음으로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이러다 여행 중에 방탄까지 보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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