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 Jul 30. 2021

시작하는 글 : 같은 이야기, 다른 마음

경험이란 책'어린 왕자'처럼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을 준다

이 사회에 내 자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랬다.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바뀌지가 않았다.


내가 그동안 해온 거라곤 공부뿐이었다. 물론, 친구들과의 정서적 교류나,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 연애 경험도 있기는 했지만, 그런 게 사회에서의 내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회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국가와도 같았다. 평생을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이해할 수 없었고, 복잡한 데다 어려웠으며, 그 불합리함이 끊이지를 않았다.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난 그냥, 반평생 이상을 학교란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자라 온 화초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하게 노력을 배신하는 현실과 마주하기가 두려워했던 거 같다. 나는 좌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평생 성공의 경험이 적었음에도 좀처럼 실패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대학생’인 내가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고, 하고 싶어서 택한 전공을 열심히만 해도 내 역할을 다 한 거니까.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한 건데, 당연한 일을 해도 잘한다고 칭찬받을 수 있었으니까. 교수들의 수업 방향을 파악해서 그대로만 따라가거나, 남들이 한 거에서 조금만 더 노력하여 준비하면 뛰어나다고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까.

인정 욕구가 높고 요령이 없는 내게 대학은 안전한 병원에서 즐기는 마약과도 같았다. 나는 아무래도 ‘대학생’이 적성에 맞는 거 같았다. 이건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솔직해지는 건 어렵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실패가 두려워 사회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것들 좀 보고 싶어서요”라고 말하는 게 그럴듯하고 있어 보였다. 게다가 세상은 이 시기를 “갭 이어”라는 멋진 말로 포장까지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1년 간 계속해서 되뇌었다. 


“갭 이어예요.”

“지금 갭 이어 기간이거든요.”

“갭 이어야.”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2-3년간은 생각의 변화가 없었다. 최면이 꽤 잘 들어 먹혔던 거 같다. 이게 자신의 비겁함을 못 견딘 내 무의식 속 자아가 적당한 말을 뽑아 쓴 거뿐이었다는 걸 근래 들어서야 알게 됐다.


근 1년간 나는 무수한 실패를 했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패할 때마다 나는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져갔다. 

참고로 나는 지금도 실패 중이다. 아마 이 인생은 계속해서 실패의 경험들을 쌓아가겠지…


흠씬 두드려 맞고 멍한 정신으로 깨달았다. 


‘4년 전에 진작 뚜까 맞았어야 하는 걸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맞고 있는 거구나…’


어린 왕자가 연령에 따라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을 주는 거처럼 나의 ‘도망’도 시간이 지나며 내게 다른 깨달음을 주고 있다. 경험에 완전한 정답은 없다. 어린 왕자가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추상적인 이야기 속에 각자의 경험들을 어린 왕자에게 투영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 이 이야기는 ‘지금’의 내가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하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괴롭기만 했던 경험이 지금에서는 추억이 되고, 그때는 흥미로웠던 사건이 지금은 불쾌하게 여겨지는.


최대한 유쾌하게는 써보려고 노력하겠으나 아마 전체적으로 이 글은 우울함을 기반으로 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의 내가 갖고 있던 감정들은 전부 불안, 슬픔, 서러움,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의 제목을 나는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고 정했다. 송구한 시기였지만 사람과 관계, 그리고 세상을 보는 데 이후에 큰 도움이 되어 준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나’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게 되면서 남의 정의에 빗대어 자신을 판단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짧고 굵게 비겁한 인간으로 살았기에 남은 인생을 덜 비겁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확실히 도움이 된다. 나는 ‘도망'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결국 도망친 자리로 되돌아오기 위한 발버둥. 


영원히 떠난다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이사다. 이사를 갔으면 옮긴 자리에서 적응하면 된다.

그렇기에 이건 돌아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라 볼 수도 있겠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남들 다 묵묵히 내딛는 사회로의 한 발을 누구보다 어렵고, 유난스러워하는 그 시절의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척 봐도 미숙한 이 청년과 함께 30여 개 국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비겁하고, 어리석고, 겁 많고, 찌질하기까지 한 이 인간을 넓디넓은 마음으로 지켜봐 주길 바란다. 성격 급한 분들을 위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저때보다 상태가 괜찮다. 일단 배드 엔딩은 아니란 거다. 글 속의 ‘나’도 여행의 뒤로 갈수록 점점 나아진다. 아마도…


그러니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부터 나와 함께

중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코소보, 그리스, 터키, 모나코, 대만,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일본

에서의 경험들을 즐겨주면 좋겠다.  


물론 나의 경험들이 한 나라의 문화나 분위기, 사람, 관습 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개인적 일뿐이란 것을 읽으면서 반드시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말은 헝가리의 속담이다. 원어로는 ‘Szégyen a futás, de hasznos’라고 쓴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동명의 일본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되었다.

‘도망 일기’를 계획하기 시작하면서 제목에는 반드시 ‘도망’이란 단어를 꼭 쓰고 싶었다. 그것이 내 여행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 이 단어는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면 문장 자체를 촌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고 ‘도망’이란 단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 일본 배우 한 쌍이 결혼하게 됐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다. 두 배우는 같은 드라마에 주연으로 함께 출연했었는데, 그 드라마가 바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였다.


나는 기사 속 이 문장을 보자마자 ‘이거다!’라며 곧바로 제목을 메모장에 옮겨두었다. 말주변 없는 사람을 위해 누군가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속 시원하게 해주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도망 일기의 제목이 되었다. 

이후에 물론 드라마도 챙겨 봤다. 좋은 드라마였다. 두 배우가 평생토록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