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은 아니었지만, 많이 아쉬웠던 그의 은퇴식
사실 못 볼 뻔했던 영화였다. 이미 전작인 <007 - 스펙터>에서 믿고 있던 샘 멘데스 감독에게 뒤통수를 맞은 데다가, 개봉 직후 혹평으로 점철되기 시작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들이 영화관으로 가기 애매하게끔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린 시절 OCN과 슈퍼액션을 붙들고 드문드문 재미나게 봤던 이 시리즈에 대한 추억이 방울방울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스카이 폴>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며 느꼈던 희열은 아직까지도 선명히 남아있었기에, 결국 필자는 다니엘 크레이그 형님과의 '으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을이' 되기를 자청하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서인지, 아니면 필자의 팬심에 의한 보정이 무의식 중에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충분히 즐거웠고, 후회 없이 영화관을 나올 수 있어 실로 다행이었다. 적어도 한 세기를 풍미한 캐릭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로서의 기본 정도는 하고 있는 느낌이었달까(한 캐릭터의 은퇴작이라는 면에서 궤를 같이 하는, 최근의 <블랙 위도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이성을 찾은 뒤 다시 돌아보니, '분명 좋은 점들보다는 아쉬운 점들이 훨씬 많은 영화이기는 하구나', '이래서 관객들이 이 영화에 좋은 평을 할 수만은 없었겠구나' 싶었기에, 이번 글에서는 좋았던 점들, 그리고 나빴던 점들로 나누어 보다 냉정한 평가를 해보려 한다.
전작들보다는 조금 수다스러워진 느낌이 있지만, 이번 <노 타임 투 다이> 역시 '다니엘 크레이그 다웠던 007'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액션이나 마초적인 매력, 그리고 '고뇌하는 본드' 캐릭터도 잘 살아있다. 여전히 그는 영화 내내 멋졌고, 영화 내내 고생했다.
우선 <007 - 노 타임 투 다이>의 메인 스토리 라인은 바로 전작인 <스펙터>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 그 수장인 블로펠드(크리스토퍼 왈츠)가 잡히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 스펙터라는 조직 자체는 상당히 베일에 싸여있고, 본드의 새로운 연인인 마들렌 스완(레아 세이두) 역시 스펙터와 연관된 비밀스러운 과거를 가진 인물이니만큼 그 이야기를 이번 시리즈에서 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요원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인물인 제임스 본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007 - 카지노 로얄>의 연인,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를 매개로 현재의 연인인 마들렌 스완(레아 세이두)와의 이별을 이끌어냈던 오프닝, 영화의 중반부 숲 속에서 혈혈단신으로 적들을 무찌르는 <스카이 폴>을 연상케 하는 전투 장면은 오랜 시리즈의 팬 분들께는 분명 반가운 광경이었으리라.
결국 이 영화는 다소 임팩트가 부족했던 <퀀텀 오브 솔러스>를 제외한 전작 <카지노 로얄>, <스카이 폴>, <스펙터>의 모든 요소들을 버무려 영화의 무게를 더하고,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두 이 작품에서 마무리짓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캐리 조지 후쿠나가 감독이 확실히 전작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하고 있으며, 최종작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전작들을 계승, 마무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이 선택은 좋은 쪽으로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 역시 전작을 신경 썼다는 데에서부터 비롯된 것들이 많지 않나 생각한다. 외려 전작을 너무 신경 써서 문제였던 점이 많았다면 많았달까.
<노 타임 투 다이>는 음식에 비유하자면 마치 '섞어찌개' 같다. <스펙터>의 맛이 꽤 강하게 나는데, <카지노 로얄>과 <스카이 폴>의 향기가 미미하게 첨가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음식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속에서 <노 타임 투 다이> 만의 고유한 맛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
스토리, 무게감 등 전편의 이야기들에 희생된 부분이 꽤나 많지만, 가장 크게 희생된 부분을 하나 이야기해보자면 역시 이 영화의 악역, 룻지퍼 사핀(라미 말렉). 기괴한 일본 식 가면을 쓰고 등장했던 오프닝만큼은 그 어떤 악역들 못지않게 위압감 있었지만, 이후 <스펙터>의 나머지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하면서 보다 영화 전체적으로 고루 영향력을 끼치며 그의 흉악함을 관객들에게 알릴 기회를 얼마 얻지도 못했고, 후반부에는 인질로 잡고 있던 본드와 마들렌의 딸인 마틸드를 그냥 놓아주기도 하는 등 설정 상으로도 구멍도 뚫리기 시작하며 여러 모로 매우 아쉬운 악역이 되고야 말았다(감독 개인의 조국에 대한 애착이 너무 주입된 나머지 과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꾸며진 일본식 스타일 역시 뜬금없었고). 라미 말렉이 악역으로서 보여준 집요함과 표독스러움은 그가 스크린에 비치는 동안에는 나름 잘 드러난 편이나, 그에게 영화 전체적으로 주어진 스크린 타임이 너무나도 짧았고, 그 결과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 그리고 중간중간 얼굴을 비추는 정도로 그의 역할이 축소되어버리고야 말았다(이는 엄연히 본편의 아이덴티티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스펙터>의 이야기에 자리를 너무나 많이 내준 연출적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스펙터>에서 이어지는 스토리와 새로운 스토리가 어우러지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 역시 이 영화의 크나큰 단점. 영화 내내 룻지퍼 사핀이라는 악역이 따로 존재하고, 스펙터라는 조직이 또 존재하는데 그 둘이 영화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느낌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느낌이랄까. 적당한 선에서 <스펙터> 스토리를 정리하고 본편으로 나아갔다면 좋았을 텐데, 영화의 후반부까지 너무 짙게 그 향기가 남아있는지라 마지막까지 그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또 전작을 잘 이어가는 듯하면서도 서로 플롯 충돌이 발생했다는 점 역시 아쉬운 부분. <스카이 폴>을 다시 떠올려보면, 활동을 접고 은둔해있던 제임스 본드가 오랜만에 본부로 복귀한 후 요원 능력 테스트에서 모두 떨어져 체력적, 정신적으로 모두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오랜만에 복귀한 그가 요원으로서 온전히 능력을 보전하고 있다는 스토리는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스카이 폴> 이후 꽤나 많은 세월이 흘러 그의 신체적 능력이 그때보다 떨어졌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오프닝에서 베스퍼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찌 보면 양날의 검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초반부만 떼어놓고 보자면 굉장히 감성적으로 좋은 연출이 이루어진 것이 맞지만, 이렇게 되면 본드가 영화 내내 베스퍼를 완전히는 잊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탓에 그와 마들렌의 러브 스토리, 그리고 그에게 생긴 새로운 가족에 대한 애착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말까지 이어지는 아주 크리티컬한 스토리였기에 더더욱 섬세한 연출이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사후에 제대로 되지 못해 후반부에는, 그러니까 영화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후속작에의 출연이 결정되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배우 중 하나로 꼽히는 아나 데 아르마스가 생각보다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퇴장했다는 점 역시 작은 아쉬움 중 하나라면 하나겠다. 아마도 캐스팅은 해놓았는데 풀어야 할 이야기들이 많아 캐릭터의 비중이 갈수록 작아져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데, 007이라는 시리즈에서 보지 못했던 밝고 천진난만한, 아주 독특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이니만큼 잘 키워서 때때로 시리즈의 감초로서, 더 크게는 본드걸로서 더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기를.
제임스 본드가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결말 역시 관객들의 감정을 고양시키기에는 나름 충분했으나, 007 시리즈를 위한 결말이라기에는 너무나 클리셰스러웠다는 점에서도 아쉬웠다 생각하며, 이는 사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연출 덕분이 아닌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전부터 쌓아 올린 스토리의 무게감이 이루어낸 성과에 가깝다는 점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역대 007 가운데서도 가장 고생했던, 또 가장 외로웠던 본드였던 그에게 가족이라는 것이 생기고, 그를 통해 안정이라는 가치를 얻을 기회를 얻으려다 놓치게 되는 광경은 007 시리즈의 팬이라면 굉장히 생경하고도 짠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겠지만, 이전에 <스카이 폴>이라는 작품이 보여줬던 깊이를 생각했을 때 <노 타임 투 다이>가 제시한 결말이 한없이 노멀하고, 얕다는 느낌을 지우기에는 정말 한 없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아... 결국 이 시리즈마저 함락당하다니. 007을 결번으로 남기지 않고 굳이 '흑인'이자 '여성' 캐릭터인 '노미(라사냐 린치)'에게 인계했다는 점과, 그녀가 제임스 본드를 대하는 시건방진 태도는 이 유서 깊은 시리즈 역시 페미니즘과 PC주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필자에게 아쉬움, 그리고 불편함을 안겼다(비록 후반부에 그녀가 007의 넘버를 다시 본드에게 돌려주는 장면이 나오기는 했으나, '엎드려 절 받기 수준'으로 이루어진 행위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는 없다 생각한다). <스카이 폴>에서 007을 보좌하는 비서 역할인 '머니페니'가 흑인으로 바뀌었던 것까지는 뭐 이해가 갔다만, 온갖 위협에 맞서서 때로는 맨손으로도 격투를 벌이며 싸워야 할 강한 요원이 되기에는 새로운 007이 '굳이' 흑인 여성이라는 점은 기존의 시리즈와는 너무도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다른 어디도 아닌, 전통을 그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의 시리즈가 그런다니 더더욱 그러하다!).
한 시리즈, 그리고 한 시대의 상징이었던 캐릭터였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와 그의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선대 제임스 본드들 중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은퇴식'이 거행되었는데, 필자는 그가 시리즈에 해준 것을 생각하면 실로 마땅한 대우였다 생각한다.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선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시리즈의 스타일을 바꿔놓은 캐릭터였다. 과거 숀 코네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식 '매끈하고 기품 넘치는 제임스 본드'가 온갖 최신식 무기들과 화려한 입담으로 전장을 수놓았던 것과는 달리, 다니엘 크레이그는 온갖 고생과 맨몸 액션을 사서 해가며 미션을 수행하는 '상남자식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구축했기 때문이다(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방탄 자동차, 그리고 폭탄이 장착된 시계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기점으로 시리즈에 철학과 깊이가 더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카지노 로얄>에서는 '요원으로서의 제임스 본드'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제임스 본드'를 조명, 피도 눈물도 없는 요원 역시 한 명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전에 없던 울림을 주었고, <스카이 폴>에서는 디지털 시대에서 어느새 '아날로그'해져 버린, 구식이 되어버린 007의 필요성에 대한 관객들의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주 철학적이고, 신사적으로 말이다. 이전의 시리즈들이 멋진 제임스 본드와 섹시한 본드걸, 최첨단 장비 등의 화려한 볼거리와 눈요기에 치중한 '즐거움을 주는 시리즈'였던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이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통해 007 시리즈가 그 나름의 철학이 담긴 영화로 한 층 진화했다는 증거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시리즈 자체적으로도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관객들에게 제시해야만 했던 시점이기에 그저 그에 맞는 대답을 내놓았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이 시리즈가 그동안 쌓아온 시간과 노력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을 결과물이었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었던 배우 중 한 명이 바로 다니엘 크레이그였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것이고.
이대로 시리즈를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엔딩 크레딧까지 영화를 지켜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이 영화는 007이라는 프랜차이즈의 종결 대신, 'James Bond is Back'이라는 한 문장과 함께 시리즈의 재출발을 선언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선언이 과연 제대로 지켜질 것인지, 또 이게 과연 옳은 판단인지 벌써부터 걱정과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차라리 <스카이 폴>에서 이 시리즈의 마무리를 지었더라면,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작품으로서 길이길이 기억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 시리즈가 후속작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배우를 새로 기용할지, 새로운 주인공인 '노미'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가지고 이 위기를 타개하려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노미가 자기 자신을 '본드, 제임스 본드'라며 소개하는 장면은 상상이 잘 가지 않는 만큼, 부디 새로운 007의 자리가 이 시리즈의 전통과 부합해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 부디, 이 시리즈가 과거 <맨 인 블랙 - 인터내셔널>이 그랬던 것처럼, 고유의 스토리를 만들기보다 잘 나가고 있는 시리즈에 무임승차하려는 것으로 컨텐츠 부족을 해결하려는 '그들'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