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자 '글리치 커피', 최고의 커피가 여기에
여러분, 혹시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TMI이지만 필자는 매일같이 집에서 드립커피를 내려먹을 정도로 좋아하는데, 필자와 같은 '커피 러버'에게 있어 커피란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생필품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매일같이 쓰는 생필품에 큰돈을 쓰기란 쉽지 않은 만큼, 커피에 비싼 돈을 투자한다는 것은 그만큼 좋아한다는, 아니 그 이상으로 커피를 사랑한다는 일종의 증표 중 하나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가볼 도쿄의 유명 카페인 '글리치 커피 긴자'(GLITCH COFFEE GINZA)는 스스로에게 그런 증표를 부여할 수 있었던 고급 카페이자, 커피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간만에 필자가 이 여행기의 제목답게 철부지스러운 면모를 발휘한(?) 곳이기도 하고.
츠키지 시장에서 나와 글리치 커피로 이동하던 중 발견한 '요네모토 커피 본점'. 존 레논 등 유명 인사들도 들렀다는 시장 외곽의 오래된 카페인데, 그 맛이 몹시 궁금하나 이번에는 패스하기로.
가는 길에 발견한 뽑기 기계. 이상하리만치 건장한 달토끼들이 떡을 만들고 있다. 이건 못 참지. (2개를 사서 한 마리는 통을 붙잡고, 한 마리는 망치를 휘두르는 모양으로 짝을 맞추려 했으나 실패했다.)
외부부터 일본 특유의 멋을 뿜어내는 또 다른 카페. 하지만 유혹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커피는 글리치에서 마실 테다.
조금 더 걸으면 명견 '체리'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시부야의 명물인 '하치코 동상'이 떠오르지만 아마 무관할 듯.
공원을 건너자 바로 줄이 길게 늘어선 곳이 보이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저곳이 글리치 커피가 맞는 듯하다. 츠키지에서도 1시간을 기다려 점심을 먹었건만, 커피도 이렇게 마셔야 할 줄이야...
솔직히 여기서 다른 카페를 갈까 고민했다. 고작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할 줄은 정말 예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스스로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맛있어봤자 커피인데, 뭐가 얼마나 다르겠나'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가 내 생각만큼 커피를 좋아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나기엔 섭하니 어디 한 번 기다려 보자.
그렇게 긴 줄을 버티고 버텨 도달한 가게 앞. 이게 무려 1시간 반 만에 찍은 사진이다.
지난해 8월에 와이프와 함께 갔던 도쿄의 또 다른 유명 커피샵, '커피 마메야'에서도 이 정도로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맛이 대체 어떨지 궁금함이 증폭될 대로 증폭된 상태다. 부슬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안 좋은 날씨 속에서도 사람들이 이토록 기다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걸어본다.
내부에서 바리스타가 열심히 원두의 향기를 맡고 있다. 확실히 일반 카페보다는 '커피 전문점'다운 스멜이 풍기는 것은 확실하다.
주문 방식을 보아하니 앞에 진열된 원두 중에서 취향에 맞는 원두를 추천받는 방식인 듯하다. 커피를 추천해 주는 바리스타가 한 명 있고, 나머지는 커피를 내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기다리니 문이 열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매장 안으로 들어와 바리스타와 이야기를 나눈다. 영어가 상당히 능숙하신데,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하니 굉장히 반가워하시며 어디서 왔는지, 평소 원두 취향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물으신다. 잠시 스몰토크를 좀 하다가 산미가 좀 있고, 과일 향기가 나는 2~3개 원두를 추천받아 향기를 맡았는데 그중 하나가 압도적인 향기를 내뿜는다. 그래서 가격표를 보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한 잔에 2300엔, 한화로 무려 21000원이란다. 웬만한 식사 두 끼를 해결하고도 남을 금액. 정신을 차리고 다른 원두들을 기웃거려 보지만 이미 필자는 저 녀석의 향기에 취한 상태. 다른 원두가 눈에 찰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이런 값 비싼 원두를 언제 맛보겠나. 옆에서 등짝을 때릴 와이프도 없겠다, 시원하게 카드를 긁고 안으로 들어와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이보다 살 떨리는 마음으로 커피를 주문한 적이 있었나 싶다.
잠시 기다리니 원두 이름으로 불러준다. 필자는 뜨거운 드립커피를 시켰는데, 자고로 이런 '커피 전문점'에서는 원두의 맛을 가장 잘 살리는 추출 방식인 드립 커피를 뜨거운 형태로 마시는 것이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아이스 음료는 얼음이 녹으면서 커피가 연해지는 만큼 선호하지 않는 편).
묵직한 잔 받침 위에 잔과 호리호리한 드립서버(혹은 디캔터), 그리고 원두의 정보가 적힌 페이퍼가 정갈하고 멋스럽다. 드립서버의 경우 커피를 조금씩 덜어 본래의 맛과 온도를 더 잘 유지하며 맛보라는 의도로 같이 제공되는 걸로 아는데, 국내에서도 소수의 커피 전문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녀석이다. 그럼 어디 한 번 맛을...
"와... 뭐지 이거?"
육성으로 나오는 감탄을 참을 길이 없다. 커피에서 이 정도로 강렬한 딸기맛과 향이 나다니... 모든 면에서 정말 높은 수준에 있는 원두이자 커피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그 맛과 향이 대단하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상큼 달달한 과일향이 진하고, 찌를 듯 강렬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정말 딱 기분 좋을 정도만, 딱 그 정도만 '탁'하고 치고 올라오는 산미의 밸런스가 기가 막히다. 단맛도 어느 정도 있고.
특히 놀라웠던 건 원두 정보지 상의 맛 표현인 '테이스팅 노트'(Tasting note)에 적힌 맛이 확연히 느껴진다는 점. 한국에서 드립커피를 먹거나 원두를 사서 집에서 먹을 때에도 이렇게 맛이나 향이 확실하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그 맛을 한 개도 아니고 몇 가지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대단하기도 하다.
필자가 고른 '콜롬비아 후일라 라스 플로레스'의 경우 복숭아, 딸기, 히비스커스, 풍선껌,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열매라고 한다)의 맛이 난다고 적혀 있는데, 특히 딸기와 풍선껌 향기가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최근 커피 업계에서 향을 입힌 '가향 커피'가 유행한다고들 하던데, 향과 맛이 너무 강렬하다 보니 그런 종류의 원두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과거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2013)>에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된다. 경이롭다.'라 평했는데, 필자에겐 오늘 이 커피가 바로 그런 느낌을 주는 무언가가 아니었나 싶다. 다소 오버스러운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 정도로 강렬한 커피, 아니 강렬한 체험이었다.
긴자 글리치 커피. 비싼 가격과 긴 대기 시간이 다소 부담되는 곳이긴 하나, 여타 커피 전문점들과는 확실히 다른 차원에 있는 곳이긴 했다. 그러니 본인이 스페셜티 커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드립커피를 즐기는 분이시라면 한 번쯤은 와 보시길 추천한다. 1000엔대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원두들도 있으니, 필자처럼 '커피 위의 커피'인 스페셜티 원두에 입문하고픈 분들에게도 좋은 곳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