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쁜 딸이 되고 말겠어요.
20여 년 만에 가물가물한 그 이름을 떠올렸다. '곽'씨 성이 독특해 기억난 건지, 명절마다 보내온 안부 문자 속 발신인이 뇌리에 남아서인지 단번에 그녀의 연락처를 찾았다.
"여보세요. 혹시 저 기억하시겠어요?"
"네, 현아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네, 여쭤 볼 게 있어서 전화드렸는데요."
첫 직장에 취업한 후, 엄마 소개로 보험설계사를 만났다. 엄마는 성격도 딱 부러지고 일도 잘한다면서 꼭 그 녀에게 보험을 가입하라고 했다. 엄마에게 등 떠밀려 약속을 잡았지만 스물넷 인 내게 암, 뇌혈관 질환, 사망, 진단 등의 단어는 다른 세상 속 언어였다. 뽀로통한 표정으로 네~네~ 짧은 대답만 하는 내 앞에서 그녀는 꿋꿋하게 담보와 특약을 설명했다. 제2외국어 듣기 평가를 하는 것처럼 해석 불가능 한 말을 들으며 앉아 있고 싶지 않아 틈을 노리다 말했다.
"최소금액으로 짧은 기간 동안 납입하는 보험 하나만 추천해 주세요."
곧 그녀는 월 오만 원, 10년 납이라는 조건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고 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 이후, 그녀는 명절 때마다 회사 앞으로 와 식용유, 참치, 샴푸세트 등을 전해줬다.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받는 선물과 안부인사는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해 결국 실비보험 하나를 더 가입했다. 이번에는 조건이 하나 더 붙었다.
'백세까지 보장되는 실비 보험으로 추천해 주세요.'
벽에 똥칠하지 않고서도 백 세까지 살 자신감이 충만한 청춘이었다.
큰 병과 사고를 피해 무탈하게 이십 년을 보내다 보니 그녀의 이름도, 내가 가입한 보험의 보장내역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보험사 앱에 영수증을 올리는 건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그것도 기껏해야 피, 초음파, 엑스레이 검사비를 청구하는 게 전부였지만.
한 해가 가기 전 미루던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동네 산부인과를 검색했다. 속전속결 끝내고 싶어 이름난 산부인과가 아닌 시설이 깔끔해 보이는 개인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무료해 보이는 간호사에게 접수를 하고 곧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팔 개월 전 받은 종합 건강검진 결과서를 내밀었다.
"여기에 산부인과 내원을 하라고 적혀있어서 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의사는 딱딱한 표정으로 "검진 시기가 꽤 지났네요. 이런 경우는 세 가지 검사를 권해드리고 있어요. 일단 검사하고 결과 나오는 거에 따라 치료방법이 달라지니까, 오늘 검사부터 하시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간호사는 나를 옆방으로 안내하며 부직포로 만든 치마를 건넸다.
"속옷까지 다 벗으시고 나와서 의자에 앉으시면 됩니다."
예상했던 순간이 들이닥쳤다. 굴욕의자라고 부르는 곳에 앉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밑으로 쇳소리 나는 도구들이 들락날락거렸다. 절로 고개가 비틀어지고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불편하셨죠? 이제 끝났으니 옷 갈아입고 내려오시면 됩니다."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불편했다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옷을 입었다.
나의 신체 중 가장 예민하고 소중한 곳을 본 의사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모니터를 돌려 자궁내부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세포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상태가 아주 안 좋습니다. 큰 병원 가서 조직검사를 해 봐야 할 확률이 90프로입니다."
12월 어느 날, 그렇게 내 인생에 '암'이 찾아왔다. 생애 주기 꼭짓점에서 만난 작은 언덕이었다. 의료대란 속 운 좋게 대학병원 진료를 잡아 조직검사와 수술을 동시에 치렀다. 진단서에서 찍힌 내 병명은 상피내암(제자리암). 보험 설계사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제가 자궁 쪽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받았는데, 보험청구를 해야 할 거 같아서요. 그런데 엄마에게는 알리지 않았..."
"네, 알았어요. 현아 씨, 엄마에겐 비밀로 할게요. 근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내가 하려던 말을 그녀가 먼저 뱉었다. 엄마에게 비밀로 해준다는 그 말이, 몇 백만 원의 보험금이 지급된다는 말보다 더 든든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알고 보니 흔한 암이고, 전혀 아프지 않았고, 지금도 멀쩡하다고, 구구절절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보험 약관을 살펴보고 필요한 서류를 문자로 주겠다고 했다. 미루던 숙제를 비로소! 완전히! 마무리한 날이었다.
자궁경부암 0단계, '1이 아닌 0'이라 천만다행이지만, 그 조차도 엄마와 아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난 신경 쓸 게 없는 둘째 딸 이미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아픈 딸은 한 명이면 족하기에. 암인 듯 암 아닌 선고를 받은 내가 또 다른 아픈 손가락이 될 순 없기에.
언젠가 들키게 된다면, 그때 흔쾌히 나쁜 딸(년)이 되면 되니까.
경주마처럼 달리던 내게 하늘이 잠시 멈춰도 된다고 브레이크를 내려줬다. 덕분에 놓치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돌보고 있다. 아직 들추지 못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더 큰 언덕을 오르내릴 연습을 한 것뿐. 부적 같은 말을 믿고 수많은 IF (그날 병원을 가지 않았더라면)를 되새기며 내게 허락된 평온과 건강을 누려보리. 보리. 쌀.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고선경, 신년운세 中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