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위로가 필요한 날

알고리즘이 안내한 클래식, -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by 아는이모

버스에서 내렸다. 가로등 빛 아래로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매섭도록 추운 바람이 손끝을 스쳤다. 저녁 준비를 하러 서둘러 집으로 가려는데 귓가에 들리는 음악이 내 발걸음을 멈췄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다 스쳐서 재생된 음악이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따뜻한 선율이 마음을 찬찬히 데우더니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음악이 어느 순간 위로로 다가왔다. 시린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도 왼쪽 가슴은 아랫목처럼 따뜻했다. 그 온기가 사그라들까 봐 가로등 앞을 한참 서성인 후에야 걸음을 돌렸다.


'암'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자꾸만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내가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거듭 의문을 품어도 답은 불분명했다. 아니, 답은 정해져 있다. 온 국민이 아는 단어, 스. 트. 레. 스.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가 원인일 게 분명했다.


십여 년 동안 나에게 왔던 크고 작은 스트레스들을 되짚어봤다. 내겐 스트레스란, 낯선 곳으로 내딛는 애씀이었다. 고통과 인내 동반한 애씀은 도전을 앞두고 넘어야 할 일종의 허들이었다. 새로운 글을 쓰고 낯선 곳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 지난 몇 년간 몰입해서 반복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기에. 주위에 그런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기에 있는 힘껏 글을 쓰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갔다. 마음은 언제나 전속력을 다했는데 몸은 삐걱거리고 있었나 보다.


대학병원에서 암(다행히 상피내암이었다)으로 진단받고 5년간 산정특례 대상자가 되었다. 조치를 취해야 했다. 몸을 우선적으로 돌봐야 했다. 어떻게 스트레스를 줄일 것인가. 그것이 고민이었다. 유기농 식재료로 매끼를 챙기고 운동을 하며 하루 이틀, 한 달을 보내면 건강해질게 분명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눈앞의 허들을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단언컨대 즐겁고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수술을 기다리는 한 달 동안 난 외로운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남편에게는 일을 줄이고 몸을 돌보겠다 했지만 마음은 자꾸 허들 앞에서 한쪽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아직도 나는 배우고 싶고, 쓰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많다. 그걸 꺼뜨리고 살 수 있을까. 리셋 버튼을 누르고 돌아가려니 '재발'과 '전이'란 단어가 내 발목을 잡았다. 무서운 생각은 깊은 잠을 앗아갔다. 새벽에 깨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 아이를 두고 떠난다면...'(오버가 심했다. 하지만 당시엔 제어가 불가능했다)이란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남은 이들이 겪을 수많은 아픔이 떠올라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음식을 하고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하고, 시시콜콜한 잔소리도 빠트리지 않았지만 이불 곳곳에 스민 걱정 때문인지 밤은 유독 길기만 했다.


병원을 드나들며 건강한 몸으로 가족 곁에 있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뼈저리게 보았다. 찬찬히 높아지는 허들을 등지고 평평하게 고른 땅으로 걷기로 했다. 꼭꼭 씹은 다짐과 달리 갈림길 앞에서 난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까.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교향곡 1번의 초연이 대실패로 끝나면서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4년 동안 거의 작곡을 하지 못하다 심리 치료를 받으며 점차 회복했고, 1901년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대중과 평단의 큰 찬사를 받으며 명성을 되찾았다. (위키백과 중)



혹평에 시달리다 심한 우울증을 극복하고 쓴 음악이었다. 크고 높은 허들 앞에서 그는 얼마나 울었을까. 주저앉았다 일어나기까지 얼마나 스스로 채찍질하고 시험했을까.


새찬 바람에도 달이 빼꼼히 얼굴을 비추던 날, 흩날리는 눈은 땅에 닿자마자 사라졌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란 위로는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허들을 지켜만 보고 있어도 괜찮다고. 넘든 넘지 못 하든 그대로 너여도 충분하다고. 알고리즘과 뜻밖의 터치로 전해진 그날의 위로가 누군가에게도 우연히 닿길 바란다.


https://youtu.be/QCYLBUv40Ww?si=ZGf2A4AFdAF4gTSb



P.S.

차 안에서

나 : 얘들아, 이 음악 들어봐. 요즘 엄마가 자주 듣는 클래식이야.

아들2 : 제목이 뭔데?

나 :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중 3악장이야.

아들2 : 라흐... 뭐라고?

나 : 라흐마니노프

아들2 : 라면마니너코?라고

아들1 : 라면사리는 많을수록 좋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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