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이후 단원고등학교는 교장 이하 교사 대부분을 교체했고, 교실의 책상, 결상, 칠판, 화장실, 출입문을 바꾸었고, 학교 오른쪽 야산을 깎아서 5층짜리 체육관을 새로 지었다. 교사들은 이제 그날의 참사를 입에 담지 않는다
교문 옆 편의점은 그때 그대로 있다. 등하교 시간마다 남녀 학생들이 몰려서 아이스크림, 떡볶이, 우유, 초콜릿을 사 먹는다. 여학생들의 빨간 입술도 그때와 같다. 친한 아이들끼리는 립스틱 색깔도 같은데, 아마도 한 아이의 것을 함께 바르는 듯싶다. 여학생들은 짙은색을 좋아한다. 립스틱은 거의가 쇼킹 핑크나 크림슨레드가. 재잘거리며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그날의 참사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생명은 저렇게 아름답구나. 사람의 아들딸들은 저렇게 어려쁘구나, 라는 문장이 떠올라서 급히 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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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 중 절반 이상이 '진상규명'이 안 된 상태에서는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있다. 선거와 투표의 의미,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가르쳐 주던 역사 선생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살아남은 학생들은 호랑이띠(21살) 아니면 소띠(22살)인데, 이번 6월 지방선거에서 첫 투표를 하게 된다.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희생자들에게도 투표용지가 오고, 징병검사 통지서도 올 것이다. 천문학자, 파충류 연구가, 마술사, 요리사, 국어 선생님, 간호사, 아기 돌보미, 네일 아티스트, 소지섭의 아내가 되고 싶다던 꿈들과 이제 영결해야 한다.
그 4년 동안 유족들은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고 연극단을 만들고 원예, 바느질, 목공일을 배우며 슬픔을 삭혀왔다.
4.16 합창단은 희생자 가족이 12명이고 생존자 가족이 2명이다. 이들 중 부부가 3쌍이다. 어느 날 밥 먹는 자리에서 우연히 노래를 불렀는데 재미있고 화음이 맞아서 합창단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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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동영 군의 어머니 이선자 씨는 합창단에서 알토 음역이다. 합창을 시작하고 나서 알토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알토는 소프라노나 테너처럼 화려하지 않고, 존재감이 약하다. 하지만 알토는 여러 음역들을 이어주고 그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해 준다. 알토는 남을 받쳐준다. 나는 알토를 사랑한다.라고 이선자 씨는 말했다. 이선자 씨는 안산시 와동에서 김밥집을 운영했다. 이선자 씨 일가족은 외식을 하는 날에는 늘 식사를 마치고 네 가족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아빠는 트로트, 아이들은 발라드를 불렀는데, 김동영 군은 기타를 치면서 김광석의 노래 <먼지가 되어>를 즐겨 불렀다.
고 이영만 군의 어머니 이미경 씨는 연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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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공연 제목은 '그와 그녀의 옷장'인데 비정규직 중년 가장의 삶을 그린 1막 3장의 연극이다. 이미경 씨는 이 연극에서 중년 남성 가장의 역할을 했다. 비정규직 가장 역할을 하니까,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의 슬픔과 고통을 알게 되었다. 또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너, 아빠를 알아?' 이런 무심한 듯한 한마디 대사에도 큰 슬픔이나 사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때, 행복하고 편안했다. 인간의 시선에 선의가 살아있음을 느꼈다.라고 이미경 씨는 말했다. 관람 요금은 후불제다. 연극을 보고 나서 돌아갈 때 감동한 만큼의 액수를 모금함에 넣고 간다(감동 후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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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문지성 양의 시신은 유실되었다가 동거차도 어부의 미역 다발에 걸려 올라왔다. 지성양의 시신은 얼굴이 없었다. 지성양 아버지 문종택 씨는 그날부터 카메라를 들고 이 참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기록해서 보관하고 편집해서 유튜브로 송출해왔다.
주부단체가 바자회를 열고 그 수익금 400만 원으로는 문종택 씨에게 카메라 장비를 사주었다. 문종택 씨는 서울에서 신문광고 업무에 종사했기 때문에 정보와 기록이 무기라는 것을 잘 알았다. 초기에 기록과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면 구렁텅이에 빠진다. 적페의 나라에는 감추고 지우고 뭉개려는 자들이 우글거린다. 고함으로 싸울 수도 힘으로 싸울 수도 없다. 기록으로 싸우겠다. 고 문 씨는 말했다.
문 씨의 컴퓨터는 최근에 바이러스 공격을 받아서, 참사 초기 1년간 찍은 자료 14 테라바이트가 증발했다. 2.5통 트럭 서너 대 분량으로, 기록의 핵심부이다. 컴퓨터 전문가들이 복원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누구의 소행인지 밝힐 수도 없었다. 문 씨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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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씨의 아내, 지성이 어머니 안명미 씨도 합창단에서 노래한다. 노동과 노래, 사람들과의 어울림으로 슬픔을 추스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슬픔에 눌려서 일할 수 없게 된 사람들도 있다.
고 김민지 양의 아버지 김 내근 씨는 참사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분향소를 지켰다. 많은 유족들이 진도, 종 거차도, 청와대 앞, 국회, KBS로 몰려갔을 때 김 내근 씨는 분향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다. 김 씨는 안산에서 종업원 7명을 데리고 의류제조업을 경영해왔다. 영세했지만 자영업자였다. 김 씨는 민지가 젖먹이일 때 부인과 헤어졌고 혼자서 민지를 열입곱 살이 되도록 길렀다. 그렇게 길렀는데 민지가 없으니까 삶이 허망해서 생업을 버티어낼 힘이 없어졌다.
그래서 안된다는 걸 알았지만 사업을 접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16일에 영결식을 하고 분향소도 없앤다니까, 이렇게 보내질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되고 나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분향소에 몰려와서 끌어안고 위로해줄 때가 지난 4년 동안 가장 기쁘고 행복했다. 고 덧붙였다.
고 박예슬 양의 어머니 노현희 씨는 안산에서 네일아트 가게를 20여 년간 운영해왔다. 가게 이름은 NY네일아트였다. N은 노현희, Y는 예슬이의 이니셜이다. 노현희 씨의 월수입은 700~800만 원정도였다고 한다. 참사 이후에도 마음을 추슬러서 계속 일을 해왔는데 지난 1월 가게를 닫았다.
예슬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찾아와서 손톱을 내밀고 꽃, 새, 나비, 배, 레이스 무늬, 펄, 반짝이를 그려달라고 하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 일 때문에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슬퍼하는 사람을 향해 악담하고 저주하고 조롱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아, 이러다가 정말로 미치는 수가 있겠구나, 심장이 터질 수가 있겠구나 싶었다.라고 말하면서 노현희 씨는 울었다.
예슬이를 잃고 나서, 길에서 눈에 띄는 남의 집 아이들이 모두 예쁘고 아프고 저렸다. 나는 예슬이를 가난하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 돈을 벌었는데, 이제 예슬이가 없으니까, 차라리 돈 벌지 말고 예슬이랑 많이 놀아주었더라면 후회가 덜할 텐데 싶다. 그래도 살아야지,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울어서 미안해요.
예슬이는 엄마의 하이힐을 좋아했다. 예슬이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엄마의 구두를 신고 멋진 포즈로 방안을 걸어 다녔다. 예슬이는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어 했다고 노현희 씨는 말했다. 기억 교실 안 예슬이의 책상 위에 예슬이 친구 혜정이가 편지를 써놓았다.
예슬아, 너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나는 슬프다. / 김혜정
장애진 양은 그날 구명조끼를 입고 물로 뛰어내려서 구조되었다. 어선에 걸려서 서거차도로 옮겨졌고, 거기서 응급구조사의 도움을 받았다. 애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기를 좋아해서 유아교육과로 진학하려 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진로를 바꾸어서 응급구조학과를 택했다. 서거차도에서 구조된 후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애진이는 대뜸 '아빠, 진상 규명해줄 거지.'라고 말했다고 애진이 아빠 장동원 씨는 말했다. 애진이는 최근에 안산소방서에서 실습했다. 애진이는 대원들과 함께 긴급출동 나갔다가 쓰러진 사람을 심폐소생으로 살려냈다. 애진이 아빠 장동원 씨는 4.16 가족협의회에서 사무처 팀장을 맡고 있다.
참사 초기에는 매일같이 골목골목에서 장례식이 열리고, 노제를 지내려는 장의차량이 학교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지금은 그 후배들이 아침마다 이 골목을 지나 학교에 간다.
집을 팔고 재산을 정리해서 안산을 떠나버린 가족들도 있다. 간다는 말도 없이, 송별의 밥 한 끼도 먹지 않고 그 가족들은 안산을 떠났다. 안산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의 빛깔은 취재할 수가 없었다.
-한겨레 2018년 4월 16일-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 중.
긴 글을 옮겨 적으며 읽고 또 읽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글을 옮기는 일.
그들에 대한 나의 작은 예의다.
그렇게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2014년 4월. 나의 뱃속에는 7개월의 태아가 숨 쉬고 있었다.
차디찬 바다에 빠진 싱그러운 영혼들을 생각하면 배가 쑤셨고 마음이 아팠다.
생명을 품은 예민함 탓일까.
따뜻한 양수에 잠든 나의 생명체는 이 사실을 몰랐으면 했다.
좁은 뱃속을 구르며 발길질하는 생명의 움직임과 가라앉은 선박에 갇혀 발버둥 쳤을 아이들의 발길질이 이따금씩 겹쳤다.
발길질이 거세질수록 잘못된 뉴스였다고. 이 일은 해프닝이 었다고 보도되길 바랬다
며칠 밤을 뒤척이며 구조 소식을 기다렸지만 나에게 찾아온 건 가진통.
절대 안정의 조치로 TV를 꺼야 했다.
바다가 앗아간 300여 명의 목숨보다 내 뱃속의 생명이 먼저였으니까.
차디찬 진도 앞바다의 소식을 멀리하며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했다.
두 달 후, 가까스로 새 생명이 태어났다.
혼란과 불신.
모순과 분노.
억측과 기만으로 가득 찬 세상에.
그들의 희생은 집단의 선봉이 되기도 때론 이용을 당하기도 급기야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돈을 받았으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논리가 아니 억지가 그들의 목소리를 희미하게 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들끓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처럼.
어딘가에 박혀 찌그러진 채 잊히는 일만 남았다.
이런 세상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게 맞을까? 란 물음은 잠시만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가소롭게 아픔을 외면하며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익숙하게 살아지는 대로 사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