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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이모 Apr 22. 2022

그는 타짜였다

유럽장미 꽃다발을 나에게 베팅한

생물에서 사물이 되고마는 꽃다발.     

꽃다발이란 키워드에 불현듯 생각 난 16년 전 가을.





 

“혹시 영화 타짜 보셨어요? 진짜 보고 싶은데 혼자 갈려니 없어 보여서.”     



에프터 신청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이 남자, 뭐지?      

2006년 10월 6일, 지난번 만남에서 과했다 싶던 아이라인을 생략하고 집을 나섰다. 뾰족구두 대신 운동화, 세팅 머리 대신 머리띠를 끼고 이마를 깠다.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이마인데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은 느낌은 뭘까. 뭐라도 까고 가야 그와 후끈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번째 만남에 19금 영화를 봐야 하는 마음의 자세이자 방책이다.      

찌들었던 수험생활, 영화관 특유의 방향제 향이 그의 체취보다 황홀했다. 가끔씩 영화 정도 보는 사이로 앞으로의 관계를 혼자 단정지은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치즈 롤까스와 크림 스파게티를 주문하니 예상대로 어색한 공기가 테이블 사이를 휘저었다. 친구얘기, 친구의 친구얘기, 친구의 사촌얘기... 남 얘기에 지쳐갈 때쯤.      



“잠시, 은행에 볼일이 생겨서, 금방 올게요.”     



영화 후기가 궁금해 검색해보고 싶던 찰나에 그의 말이 반가웠다. 타짜 영화감독, 이대 나온 여자, 짝귀 뜻, 조승우 출연작 등을 아무리 검색해도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멍을 때려보고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그는 없다. ‘나, 바람 맞은건가?’ ‘설마 이 만원이 없어 빌리러 간 건 아니겠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던 중 눈앞에 붉은 장미 한다발이 보인다.      




“늦어서 미안해요. 꽃집 찾느라, 오늘 생일이라면서요?”     




땀으로 세수를 한 건지 진짜 세수를 한 건지, 얼굴에 물방울이 가득이다. “아, 너무 더워서 들어오는 길에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왔어요.” 민낯의 자신감. 뭐지 내가 이마를 깐 용기는 용기도 아니다. 그가 들고 온 붉은 장미 한다발은 꽤 무거웠다. 영국 장미인가? 고급지다. 엑스 남친들에게 받았던 꽃다발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두 번째 만남에서 19금 영화와 꽃다발은 직진하자는 뜻이다. 그는 나에게 베팅했다. 타짜의 고니처럼.



한번 본 영화를 못 본 척 연기하고, 오늘이 생일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곤 부리나케 사라지기도 했다. 신경써서 입고 온 가디건을 벗고 땀에 젖은 면티를 노출했다. 그가 보인 무리수는 조승우 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영화관에서 맡았던 달콤한 방향제 향이 그에게서 나는 듯했다. 적절한 염분과 로즈향의 콜라보. 정체 모를 향기에 취해 그와 함께 10월의 햇살을 맞으며 걸었다. 다음번의 만남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손목이 아플 만큼 무거웠던 꽃다발을 들고 집 대신 친구 ‘S’의 집으로 향했다. 수험생이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는 건 공부 대신 연애질을 한다는 증명이자 투쟁의 선포니까.     

스물 세 송이 영국장미 꽃다발은 S의 어머니가 더 좋아하셨다. 그에게 미안하지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엄마에게 거짓말을 더 많이, 더 정교하게 할 테니까. 그가 베팅한 만큼 나도 베팅할 것 같으니까.



얼마 후 여교사가 되느냐 그의 여자친구가 되느냐를 모험했고 결국 여교사 대신 그의 여자친구, 4년 뒤에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비록 돌아오는 생일마다 꽃다발 대신 돈다발을 기다리는 여자가 되버렸지만. 꽃다발을 들고 지나가는 커플을 볼 때마다 16년 전 내손에 들려있던 영국장미 한다발이 생각난다. 활짝 핀 꽃송이 같던 우리의 청춘이 고프다. 아직도 나는 그에게 낭만일 수 있을까.




출처 : 픽사베이




* ‘S’는 11시11분에 빼빼로를 건넨 문학소녀 > https://brunch.co.kr/@onlykhsa/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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