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는이모 Apr 27. 2022

비록 똥 가루를 남길지라도

지우개와 연필. 그리고 종이






지우개. 연필. 종이



생각만 많고 정리가 안 된 날에는 묵혔던 연필을 꺼내 갈긴다. 뭉뚝한 끝이 불만일 때는 칼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

 

커피도 머신 대신 핸드드립, 연필도 머신 대신 핸드 커팅이 늘 옳다. 기호에 맞는 향과 뾰족함은 어느 정도의 노동을 요한다. 이런 움직임은 낭비가 아닌 절약이다.

 

신속함보다 신중함이 통하는 이곳. 종이 앞에서.

 

연필은 끄적임을 남기고 지우개는 똥을 남긴다.

지울 수 있기에 종이 앞에서 용감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우개만 믿고 용기를 뿜어서는 안 된다.

 


그냥 허투루 써지는 게 하나 없다.



스쳐 지나는 서로의 움직임에도

완급조절이 필요하단 뜻이다.



그리고 버텨내는 것이 숙명인 누군가도 존재해야 한다.

 


연필이 뱉는 흑연의 농도는 적당해야 하고,

지우개는 본 속성을 유지해야 하며

(똥에 오염되면, 간혹 지가 연필인 줄 착각한다.)

종이는 숱한 압력을 견디며

자신의 색과 질감을 지켜내야 한다.

 

쓰는 용감함을 함부로 자책하지 않도록

종이 앞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세련된 배려를 품어야 할 것이다.

비록 남는 것이 하얀 똥 가루일 뿐이라도.




안규철 작.
작가의 이전글 보온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