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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똥 가루를 남길지라도
지우개와 연필. 그리고 종이
by
아는이모
Apr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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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연필. 종이
생각만 많고 정리가 안 된 날에는 묵혔던 연필을 꺼내 갈긴다. 뭉뚝한 끝이 불만일 때는 칼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
커피도 머신 대신 핸드드립, 연필도 머신 대신 핸드 커팅이 늘 옳다. 기호에 맞는 향과 뾰족함은 어느 정도의 노동을 요한다. 이런 움직임은 낭비가 아닌 절약이다.
신속함보다
신중함이 통하는 이곳. 종이 앞에서.
연필은 끄적임을 남기고 지우개는 똥을 남긴다.
지울 수 있기에 종이 앞에서 용감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우개만 믿고 용기를 뿜어서는 안 된다.
그냥 허투루
써지는 게 하나 없다.
스쳐 지나는 서로의 움직임에도
완급조절이 필요하단 뜻이다.
그리고 버텨내는 것이 숙명인 누군가도 존재해야 한다.
연필이 뱉는 흑연의 농도는 적당해야 하고,
지우개는 본 속성을 유지해야 하며
(똥에 오염되면, 간혹 지가 연필인 줄 착각한다.)
종이는 숱한 압력을 견디며
자신의 색과 질감을 지켜내야 한다.
쓰는 용감함을 함부로 자책하지 않도록
종이 앞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세련된 배려를 품어야 할 것이다.
비록 남는 것이 하얀
똥 가루일 뿐이라도.
안규철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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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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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때 묻지 않은 꿈을 꾸는 아줌마. 재테크 책을 쓰고 경제 강사가 되었지만 동화와 소설을 쓰는 할머니로 늙어가길 바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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