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든 남자

꽃다발이 불러온 그날의 추억

by 아는이모

꽃다발이 불러온 그날의 추억


'**역에 내릴 승객은 오른쪽 문을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얼마만의 지하철인지.’ 밀려오는 인파에 밀려 걷다 보니 다행히 출구가 보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데 베이지색 코드에 검은색 가죽 크로스 백을 맨 청년이 ‘잠시만요.’ 그러고는 내 앞을 가로막는다. 하얀색 이어폰을 낀 그의 손에 분홍색과 흰색 장미가 어우러진 고상한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내내 나의 시선은 꽃다발에 머물러 있었다.


생물에서 사물이 되고 만다는 꽃다발, 생물이었다 사물이 되어가는 운명이 유독 애처로운 이유는 뭘까? 생기 가득한 청춘의 시간을 뒤로하고, 연애 따위의 감정에 말라버린 서른아홉의 아줌마의 운명과 닮아서일까. 문득 16년 전 받았던 탐스러운 영국 장미 꽃다발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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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가을, 상투 머리에 두꺼운 안경 보풀이 가득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학교와 독서실을 오가던 스물셋의 임용고시생이었다.


혼자 먹는 편의점 김밥이 신물이 날 때면 ‘3개월만 버티자. 딱 3개월만 지나면 소개팅도 하고, 미팅도 하며 연애도 실컷 해보는 거야.’


하지만 거울에 비친 누렇게 뜬 얼굴을 볼 때면 ‘이 꼴로 무슨 소개팅이람, 연애는 무슨.’ 지하 암반수를 뚫고도 남을 한숨을 내쉬기 바빴다.


스물셋인지 서른셋인지 알 수 없는 몰골이 진짜 내가 되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머리를 제때 감아본 적이 언제인지, 청바지를 입어 본지는, 화장을 해 본 지, 고데기를 말아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했다. 여성미라고는 1도 없는 나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그건 스물셋 청춘에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극도로 외로웠다. 몽글몽글한 연애감정, 누군가의 지극하고도 정성스러운 관심이 나에게 필요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시생의 일상에 한줄기 빛과 소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마침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고 독서실의 이름 모를 경쟁자들도 하나둘 고향으로 떠났다.


일주일 전 걸려온 친구의 전화가 생각났다.


“너, 지금 소개팅해보는 건 무리겠지, 괜찮은 선배가 있는데, 네 사진 보여주니 소개팅 시켜달라고 하도 졸라대서 해볼 생각 있어?”

“악! 무슨 사진을 보여줬길래?”

“너 고등학교 때 찍은 증명사진.”

“그게 왜 아직 너한테 있어?”

“아, 내가 지갑 새로 바꿔서 정리하고 있는데 마침 선배가 봐버렸지, 나도 이게 왜 내 지갑에 끼여있는지 몰랐다야~.”

“그 사진 엄청 비현실적으로 나온 거 알지? 어마어마한 뽀샵기술이 동원된 사진인데, 푸하하”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사진 때문이라도 못하겠다. 누구세요~? 할까 봐, 너 엄청 욕먹을 건데”

“왜 안경 벗고 화장 좀 하면 되지, 괜찮아 친구, 네 미모 아직 여전해. 자신감을 가지렴”

“안돼,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 만나는 건 부담돼. 그냥 나 기다리지 말고 다른 사람 소개해줘, 사진과 비슷한 사람 나 말고 찾아보라고.”

“그건 쉽지 않은데, 푸하하하.”

시험도 걸렸지만 사실 사진이 더 걸려서 거절했던 소개팅이었다.

‘그래, 머리도 식힐 겸 딱 3일만 놀아보자. 오래간만에 풀세팅하고 나가서 딱 밥만 먹고 오는 거야.’

뒷감당은 사진을 보여준 친구가 할 거라 생각했다. 친구니 그 정도 욕은 의리로 감싸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그 선배라는 사람. 아직도 소개팅할 생각 있대?”

“오, 해보시게? 그래 딱 추석이라 빨간 날도 많네, 안 그래도 3개월 뒤 가능하다니까 엄청 아쉬워하는 눈치더라.”

“너, 사진이랑 실물이 많이 다를 거라고도 얘기했어?”

“그럼, 당근 얘기했지. 그건 걱정하지 마.”


포스트잇에 ‘잠시만 안녕’이라 쓰고는 독서실 책상에 붙였다. 책상 위 너저분한 책은 가지런히 정리해 사물함에 넣어뒀다. ‘3일 뒤 돌아올게, 걱정 마. 놀다 와도 외운 거 기억 다 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중얼거리며 독서실 문을 등으로 밀치며 나왔다.


스물셋 반짝이는 청춘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3일의 파장이 인생을 흔들 줄 알았다면 더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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