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니트의 남자와 파르페

일탈을 즐기고 싶었던 선생님과 부처님

by 아는이모

휴대폰 어플이 없던 시절, 뽀샵으로 연예인을 만들어 준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진관에서 주민등록증에 넣을 증명사진을 찍었다. 한 편의 수묵화처럼 아련 미 가득하게 나온 내 증명사진은 한동안 이슈였다.


너도나도 나눠 가지기 바빴고(이뻐서 그런 게 아니라, 신의 경지에 이른 뽀샵기술의 신기해서) 그 사진관 정보를 전달하기 바빴다. 그때 그 사진, 5년 전 찍은 사진으로 성사된 소개팅이었다. 난 최대한 사진과 비슷해 보이기 위해 공을 들였다.


사진처럼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었고, 고데기로 머리끝을 말아 C컬과 S컬이 섞인 여신 머리로 세팅했다. 눈썹을 그리고 피치색 펄이 들어간 아이섀도를 바르고 아이라인을 길게 빼 그렸다. 굳어버린 마스카라를 티슈에 몇 번이고 닦아내 가루를 털고 속눈썹도 한 올 한 올 올렸다. 엄마 화장대에서 찾은 분홍빛 블러셔를 양 볼에 바르고 옆에 있던 오렌지 색 립스틱을 슬쩍해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신발장에서 뾰족구두를 꺼내 신었다. 2년 만에 신은 힐이었다.


약속장소는 **대학가 앞 칸막이가 있는 카페였다. 당시 카페라고 하면 오므라이스와 그라탱, 돈가스 따위를 파는 곳을 말했다. 식사를 주문하면 음료가 무한 리필되는 혜자스런 곳, 주로 그곳에서 청춘남녀는 소개팅과 데이트를 했다.( 그땐 그랬지 )


이미 그가 와있다는 친구의 문자에 난 카페 안을 두리번두리번거렸다. 칸막이 안마다 혼자 앉아있는 남성들이 그날따라 왜 이리도 많은지.


“못 찾겠어, 어디에 앉아 있대?”

“아, 거기 찾기 힘들겠다. 가려서 잘 보이지? 내가 나가보라 할까?”

“아니, 그건 좀 그런데...... 혹시 무슨 색 옷 입고 나온 지 알아?”

“아 잠시만 물어보고 문자로 보내줄게.”


띠링-


‘분홍색 니트 입었데. 대박! 나 1년 동안 그 선배 분홍색 니트 입은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분홍색이라......’ 느낌이 싸했다. 당시 나의 이상형은 소간지스타일, 빈티지가 잘 어울리는 키 크고 등빨 있는 남자였다. 불현듯 스승의 날 행사 때 윤리 선생님이 입고 온 분홍니트가 생각났다. ‘저러니 진짜 돼지 같아 보인다.’라며 킥킥대곤 했었는데......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라며 난 호흡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찾았다. 창가 구석 칸막이 안 테이블에서 분홍 니트를 입고 검은색과 빨간색이 적절히 배합된 안경테를 쓴 남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소개로 나온......”

“아~ 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휴대폰 액정을 보니 약속 시간보다 5분 이른 시간이었다. 이런 바람직한 소개팅 매너란. 왁스를 한껏 발라 세운 앞머리 밑으로 윤기 나는 이마에 박힌 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남자 뭐지? 왜 석가모니 같지?’


남자의 나이는 스물일곱, 나와는 네 살 차이였다. 역대 소개팅 남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이었다. 하얀 셔츠 위 입은 분홍 니트, 그리고 가죽 손목시계, 그리고 가죽 크로스 백......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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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 목요일마다 집에 왔던 구몬 선생님과 닮았어.’


엄마의 얇은 귀 덕분에 난 3사 메인 학습지를 받아 풀며 초등시절을 보냈다. 물론 학원비보다 싸다는 이유도 있었다. 요일별로 오는 선생님이 달랐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남자 선생님이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와 싱크로율 100%다. 분위기가 똑 닮았다. 난 피식 웃음이 났다.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아까부터 웃으시길래.”

“아, 이런데 오랜만에 와서요. 뭔가 새롭네요.”

“안 그래도 중요한 시험 준비 중이라서 소개팅 생각은 없다 하셨다고.”

“네, 그...... 그랬었죠. 임용시험 준비 중인데 힘들긴 하네요."

"선생님 되는 게 쉽지 않죠. 사명감도 필요하고...... 그나저나 오늘 큰 결심 하셨네요. 저도 사실 2차 면접 결과 기다리는 중이에요. 소개팅한다니 다들 팔자 좋다 하더라고요. 허허허.”

그랬다. 우리는 각자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일탈을 즐기고 싶었던 거다. ‘사진’을 보고 첫눈에 반한 남자의 애타는 구애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착각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자세를 편히 고쳐 앉았다. 우리는 쓸모없는 친구의 친구 이야기를 남발하며 치즈 그라탱과 스파게티를 먹고 파르페와 아이스 카페모카를 후식으로 시켰다. 길쭉한 컵에 요란한 우산이 꽂힌 파르페가 나왔다. 그는 내가 먹던 유리컵에 파르페의 아이스크림을 덜고, 체리를 얹고 우산을 꼽아 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특별히 나눠 주는 거예요.”


‘부처님 마냥 자비로움을 풍기는 이 남자 뭐지? 왜 특별해? 내가 왜? 면접 결과 기다리다 초조해서 머리 식히러 나온 거 아니었어?’


자세를 고쳐 앉고 “잘 먹겠습니다.” 말을 해버렸다.


김밥 말고 카페 음식이 당길 때 가끔 만나 밥 정도 먹는 사이면 괜찮겠다고 속으로 계산하고 있던 나였다. 그런데 우산과 체리를 넘기다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분홍 아이스크림 맛이 그날따라 복잡하고 오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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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 남자 뭐지?’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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