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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업공방 디렉터 Jun 05. 2021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펼쳐 보여주는' 버킷리스트

치료활동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적기

이 글은 재활(가명)님의 퇴원을 하루 앞두고 지난 치료를 돌아보며 한 편씩 글을 쓰기로 하고 작성한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육아휴직 후 복직해서 퇴직할 선생님 환자분들 내가 받게 되었다. 두 달이 지났는데 대부분 퇴원을 하셨다. 한 분은 입원을 하셨다가 주말에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고 하기에 퇴원을 권했고 결국 한 달도 되지 않아 퇴원하셨다. 한 분만 남겨두고 말이다. 


유일하게 아직 입원하고 계신 한 분이 재활님이다. 가장 마지막에 발병한 뇌졸중 외에도 신장이식, 장루 시술, 혈암 투병까지 겪으신 중대질환 4관왕을 이루신 분이다(본인 표현이 그렇다). 치료시간에 산책도 하고 포켓볼도 치고 닌텐도로 탁구 등 여러 스포츠를 즐기기도 했다. 여러 치료 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아버님과 버킷리스트를 적고 나누었던 활동이다. (나도 나의 버킷리스트를 나눴다)


재활님과 치료 시작 때 체력 증진을 위한 자가 운동을 했었는데 어느 날 너무 기운이 없어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퇴원하시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주제로 시작해 재활님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단순히 퇴원 후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야기 끝에 버킷리스트에 대해 설명을 드렸고 다음 시간부터 천천히 적어 가보기로 했다. 목표는 버킷리스트 100개 채우기 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함께 적기로 한 다음 날 이미 40개를 적어오신 게 아닌가. 치료가 마친 후 저녁에 버킷리스트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신 후 휴대폰 메모장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오신 것이었다. 결국 재활님은 주말을 포함해 2-3일 안에 100개를 다 채우셨고 40개를 더해 총 140개의 리스트를 완성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버킷리스트를 적어낸 것도 놀라웠지만 버킷리스트에 담긴 재활님의 삶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이 리스트 안에 고스란히 묻어 나와 읽는 내내 마음이 숙연해졌다. 적고 하나씩 음미하며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리스트업 된 이유가 다 있었다. 수년간 자신의 병시중을 해 온 아내에 대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수년간 만나지 못하고 지낸 친구를 만나러 미국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버킷리스트를 아침마다 한 번씩 읽어본다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조금이나마 힘차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가는 시간은 자신의 존재와 마주하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이는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시급하기도 하다. 버킷리스트에 담긴 내용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그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버킷리스트를 투두(To-do) 리스트처럼 다 실행에 옮기고 완료하는 게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 이루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보다는 누군가에게 기대되고 요구되는 것들에 치여 인생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때론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족과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일 보다 먼저 '나 자체'로서 살아내는 연습을 우선에 두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활동을 통해 나로서 가장 건강하게 존재할 때 나와 연결된 사람들도 함께 건강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병원에서 간병하는 가족과 도움을 받는 환자를 보면서)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도움을 주는 것은 일시적으로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긴 시간 한 방향으로 흐르는 역할과 기능으로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그게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나'를 위한 '작업(활동)'을 통해 독립된 객체가 될 때 서로를 넉넉하게 품어 줄 수 있다


퇴원을 앞두고 운전을 하고 싶다는 재활님과 사고의 위험으로 안 된다는 보호자 사이에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재활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운전의 욕구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을 수 없다면 재활님이 운전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대안을 찾는 편이 재활님과 가족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지지를 받으며 이루었을 때 가장 건강하다고 믿는다. 재활님의 140개 버킷리스트가 안내할 퇴원 후 일상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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