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9
20대의 조미지가 살아간 기록.
불안과 희망이 한데 뭉친,
잔인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편린.
나는 항상 짧고 깊게 좌절하여, 혼자 바닥을 찧고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나곤 했다. 다시 일어나 걸어갈 때는 걸음걸이조차 변해서, 멀리 있는 사람은 눈치채지 못해도 늘 가까이서 날 보던 지인들은 내가 알던 조미지가 이렇게 걷는 사람이었나? 하며 의아해 한다.
늘, 깊이 빠져드는 것도 가볍고 헤어나오는 것도 가벼운. 몸 한 번 가뉘면 부피가 달라지는 종잇장 같은 사람. 감정과 즉흥의 도가니에서 그 것이 무엇이던간에 나를 침몰 시킬 때면, 고통 속에서도 은근히 그걸 즐길 수 있는 변태. 그게 내 특성인 줄 알고 잘도 버텼다 지금까지. 세상 돌아가는 계산기에 결혼을 인생 최대의 비지니스로 인식하기 시작 할 수 밖에 없는 나이에.. 나는 왜 이제와서 이딴 말도 안되는 연애불구 같은 감각을 알게 되버린 걸까. 이놈 저놈 세지 못 할 만큼 많이 만나고 따져봐서, 그래.. 연애 한 번 죽자고 해봤으니 이제 제대로 결혼 할 준비가 되었다- 가 보통의 시나리오인데.. 이건 뭐, 어떤 드라마에서 맥이라도 짚을까. 어떤 책에서 찾아야 하는걸까.. 도통 감이 안 온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지금 연애가 하기 싫다. 하지만 결혼도 하고 싶지 않다. - 라는 것이다. 젠장.
요즘 '아이두아이두'라는 드라마에서는 슈퍼 알파걸, 워커홀릭 혼기 놓친 그녀가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그녀가 이루고 세운 것들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행복한가? 일에 성공한 외로운 여인이여.'
물론 드라마는 매우 재밌게 보고 있다. 헌데, 죽어라 일만 하는 여자가 과연 행복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다. 나는 그건 너무 유치한 질문에 관한 문제라 여겨진다. 죽어라 일만 하게 된 그 여자가- 일이 좋아 미친 것이 아니라, 일을 '죽어라' 한다는데.. 대체 행복을 그에 갖다 붙이는 것은 왠 코메디인지. 일만 하다가 결혼 시기를 놓치고, 아이가 없고, 가족도 없는 그녀가 삶의 의미를 갑자기 외로움에서부터 각색한다는 거..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질문을 야기하여 문제를 꺼내는 것의 시점이 유치하고 잔인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일만 '죽어라'했던 그녀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렇게 되버린 것인지 서술하시오- 라고. 한 여자가 자신을 일에 매다 꽂은 경위가 밝혀지면 변하는 건 없어도 잔인하지는 않다. 이미 행복은 곁에 없는 것을 기저에 깔고 하는 질문이라면 그 여자가 더 불행해지지는 않게끔 하자. 변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 온 역사를 장르 바꿔서 각색하라면.. 그건 스스로의 문제지 누군가 강요할 것도 아니니까. '여자'라는 생물이 가장 '여자'다울 수 있는 것을 참고, 버리고,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조금이라도 겪어 본 바.. 가슴 속을 짖이겨 몇 번이라도 죽을 고비를 넘겨 왔다는 것이다. 여자를 꽃에 비유하는 말이 많지 않던가? 꽃이라면 호박꽃도 가지꽃도 한 떨기 어여쁜 꽃이다. 망가뜨리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꽃 향기에 모여들었으면.. 진심으로 어여뻐 해주어라. 꽃 앞에 선 그대, 당신, 남자들.
지금까지 무슨 개소리냐면, 지금 내 꽃은 많이 상하고 지쳐버렸다. 듬뿍 비료를 주고 영양제도 줘서 다시 내 텃 밭을 가꿔 꽃으로 거듭나려고 했는데, 비료와 영양제가 나한테는 잘 안 맞는 거였나 보다.
'일'. 일하는 여자가 일로서 구원받지는 못하는 것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뼈져리게 느꼈으면서.. 또 같은 처방전으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똑같은 일에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고 마는 것이- 착하다는 비유법으로 가려진 멍청함의 증거다. 나는 멍청했다. 일하는 멋진 여자로 변모하는 것으로 대체 가능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의례 그렇듯이, 일하는 멋진 여자는 일하지 않는 예쁜 여자보다 스스로의 자기 가치가 낮다. 백마 대신 하얀 외제차를 끌고 나타나주는 키 183cm 정도의 새끈한 남자가 '나를 미치게 만드는 당신은 정말로 어메이징 한 여자야.' 라고 말해주는 전개는 훼이크고- 누구나 다 알다시피.. 논픽션만 진행 되는 이 현실속에서, 어메이징한 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일하는 멋진 여자에게 너무 버겁다. (우선.. 그녀들에게는 새끈이들을 만날 시간 자체가 없다...) 일에 미쳐 너무 좋아서, 일에게 사랑 받는 것이 행복한 그녀 일지라도, 우선은 여자. 가꿀 시간 없어 황폐해진 텃 밭의 주인이다. 사랑받고 사랑해서 꽃을 피우고 싶은 '여자'라는 생물의 뿌리같은 본능을 채우는 것. 그 것은 절대 일이라는 십자 드라이버가 맞지 않는 일자 나사와도 같은 것이다. '일'은 휴먼은 구해주지만 우먼은 구해주지 않는다. 여자의 꽃은 피우고 가꿔져야 구원 받는 것이라 그리 깨닫고 살아왔는데.. 나는 어느 순간, 내 정원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참지 못해고 다 잘라 버리고 밀어 버렸다. 이제와서 억울해 한 들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연애도 하기 싫고 결혼도 하기 싫은 지금의 내가, 이 사태를 일로서 견뎌 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뻘 짓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난 좀 억울하다.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있는데, 정작 일이 재미가 없고 하기 싫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는 이 상황이 참으로 억울하고.. 우습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을 낫게 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삶이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게끔 해주는 단 하나. 연애, 사랑이라는 상투적이지만 절대 보편적 처방전.
아.. 밤이 깊어간다.
내일은 내장이 다 상해서 내시경 검사를 받을 계획이다. 뭐가 얼마나 속이 타면 위장이 다 꼬여 터지는 건지.. 아무튼간에 아프면 내 손해- 이딴 말 집어치우고, 난 우선 아파도 약 사올 그대가 없으니, 스스로 알아서 때 맞춰 병원에 갈 것이다. 뭐.. 어차피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자, 자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