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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Mar 25. 2019

만년필- 5화

소유할 수 없는 욕망

그날부터 상진의 남은 돈을 일일이 세어가며 곤궁하게 살아가는 삶이 시작되었다. 우선 체크카드에 남아 있는 잔고를 현금으로 바꾸었다. 275,400원이었다. 요 며칠 음식 섭취를 하지 못했던 그는 당장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에서 만 원이 넘는 돈을 한 끼 식대를 지불했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꼭 필요한 식재료를 구입했다. 종량봉투와 두루마리 휴지, 치약도 구입했다. 그가 산 물건 중에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백지 노트 5권과 잉크 한 병뿐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현금은 190,000원이었다. 다음 달 1일 월세를 내야 하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그 길로 하숙집 주인댁으로 가서 월세 한 달만 늦춰줄 것을 사정했으나 집주인은 오히려 10만 원을 올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주변 시세보다 많이 싸게 해주고 있어 올려 받아야겠다고 하니 상진은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5일이 흘렀다. 별 다른 대책 없이 노트에 그림만 채워졌다. 상진은 전에 일하던 편의점을 다시 찾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지만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은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 매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상진 씨 왔네? 잘 지냈어요?”


“점장님, 안녕하셨어요. 혹시 일자리가 있나 싶어서 왔어요.”


“아니 아직도 알바 자리 못 구한 거야? 요새 이 동네에 뺑소니로 사람을 치고 돈을 뺏어서 달아나는 놈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이쪽 길로 잘 안 다녀. 근처 상점들도 장사가 안 되어 아주 난리더라고.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긴 해. 그나마 원두커피 매상이 올라가고 있어 다행이고”


“그렇군요...”

그는 편의점 주인들이 그를 무척 경계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자기에게서 뺑소니범의 얼굴을 떠올렸을 수도 있었다.


“점장님 제가 당장 월세를 내야 하는데... 혹시...”


“상진 씨. 아휴. 나 돈 없는 거 알잖아. 장사가 시원찮아.”


“아 그러시죠... 네.”


“아니 그 돈 될만한 거 있잖아. 그거."


"네? 그게 무슨..."


"지난번에 나한테 사용방법 물어봤던 그 만년필. 그거 팔면 그래도 몇 십만 원은 받을 거 같던데.”


“만년필을요?”

상진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의 제안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만년필은 상진이 유일하게 소유한 선물이고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했다. 만년필은 상진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살았던 삶에서 발견한 한 줄기 희망이었으며 자신의 손에 꼭 맞게 조각된 그의 신체 일부와도 같았다. 그에게 만년필은 그림을 통해  그가 사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래. 만년필. 그런 고급 수제 만년필은 중고나라에 올리면 그래도 꽤 값어치가 나갈 거야. 상진 씨가 그런 고급 만년필을 쓸 필요가 뭐가 있겠어. 필요하면 싼 거 하나 사서 쓰면 되고. 아니.. 상진 씨. 상진 씨!”

점장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상진은 편의점을 뛰쳐나왔다.


‘만년필을 팔라니.’

그는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어도 만년필은 절대 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5일이 흘렀다. 만년필 잉크도 벌써 떨어져 갔다. 어제부로 입추가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졌다. 월세를 내야 하는 날이 당장 내일로 성큼 다가왔다.


‘하필이면 날도 추워지는데. 돈도 거의 떨어지고 있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는 오전 내내 머리를 싸잡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는 혼자 이렇게 고민을 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집을 나섰다. 그는 또다시 전에 일하던 편의점으로 갔다. 점장님한테 10만 원만이라도 빌려보고 집주인한테 10만 원만 나중에 낸다고 사정해보면 어떻게든 한 달 정도는 더 버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점장님, 안녕하셨어요.”


“오! 상진 씨 왔어? 마침 잘 왔네.”

한 번도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준 적이 없던 그였기에 상진은 다소 생소했다.


“우리 그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엊그제 감기몸살로 결근했는데 독감이라지 뭐야. 뒤늦게 알아서 치료하는데 일주일은 걸리나 봐. 편의점 일을 1주일 이상 뺄 수가 없어서 새로 구하려고 했거든. 일하는 거 아직 가능하지?”


“아. 감사합니다. 점장님. 안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 본 건데. 오늘부터 당장 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가불.. 조금만 가능할까요. 일 시작하기도 전에 죄송합니다.”


“가불? 그건 안돼. 우리 편의점에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가불은 절대 없다는 거라고. 내가 점장 자리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건 아르바이트생들한테 일체 가불을 안 해주기 때문이야.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이는 곳이 편의점 알바인데 이런 원칙이 없이 운영이 될 거 같나? 어찌 보면 나의 경쟁력은 이렇게 철저히 원칙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상진은 억장이 무너졌지만 더 이상 가불을 부탁하기는 힘들었다.


“돈이 그렇게 급하면 만년필을 팔라니까? 막말로 그런 사치품이 상진 씨한테 왜 필요하나. 중고나라에 올리면 몇십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다가 나중에 돈 모으면 다시 사보든가.”


“다시.. 산다고요?”


“그렇지. 돈 조금 더 주면 되사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 상진 씨가 그걸 정 원한다면 말이야.”


‘그래.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다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은 다음 다시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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