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5세의 조르바를 보고 느끼며 나의 어릴 적이 떠오르는 건 그 당시 품었던 자연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 몸동작으로 표현하며 춤을 추며 까르르 웃던, 잃어버린 5살의 나를 본 것 같아서였다.
보스, 저 건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저 파란색, 저 기적이 뭔가요?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릅니까? 바다? 바다입니까? 꽃으로 된 초록색 앞치마를 입는 저건요? 땅이라고 그럽니까? 이런 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인가요?
보스, 내 맹세하지만 이런 걸 보는 게 처음이라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 나는 사회가 정해진 제도를 통해 나를 제단하고 구기고 다듬고 섬세하게 조각까지 해 놓았다. 내가 알맞은 쓰임으로 사용되는 위해서는 어떤 요상하게 만들어 놓은 작디작은 틀에서만 맞을 뿐이다. 더 큰 곳, 더 넓은 곳에서는 나를 넣기에 내가 너무 작고 정교해서 서랍 어딘가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린 비싼 현지 여행 기념품 같다.
인간 조르바는 책 따위는 집어치우고 세상에 나아가 몸으로 부딪히며 경험으로 배우라고 말한다. 그 과정 속에 사람들을 만나고 땀 흘리며 일하고 최대한 많이 사랑하라고 외친다.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모습을 느끼고 그 신비에 감탄하라고 말한다.
삶의 가치를 무엇에 둘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조르바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어떠한 움직임 없이도 핸드폰 하나로 원하는 무엇이든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몸을 쓰는 노동이 하찮은 일이 돼버리고 자연의 신비보다는 자연을 지배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현대의 인간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살고 있다. 조르바라는 인물의 외침이 시대를 초월해 큰 울림을 주는 건 우리가 더럽고 커다란 원석이었던 작은 시절 순수한 눈으로 세상과 교감했던 그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