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소란할 때 펜을 들면 일어나는 10가지 변화

by 온마음


그렇다. 나는 깊은 우울 속에 잠겨 있던 사람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7번의 시험관 시술을 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매달렸던 일이었다.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찾아오지 않았고, 남은 건 불어난 체중과 엉망이 된 마음뿐이었다. 하루 종일 의미 없이 TV만 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스스로가 몹시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는 남편을 볼 때마다 달라지고 싶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시끄러운 속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우연히 눈에 띈 책 한 권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읽다가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이 불안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다이어리에 펜을 꺼내 종이 위에 적었다. 신기하게도 읽고 쓰는 동안은 잡념이 사라졌다. 잡념이 마음을 헤집을라 치면 소리를 내서 책을 읽었고,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눈으로 읽을 때는 휙 지나가던 문장들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5줄을 쓰기에도 벅찼으나 이내 하루의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필사는 단순히 글자를 베끼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재활 훈련과도 같았다. 지난 몇 년간 책 읽고 필사하며 내게 일어난 변화를 10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여전히 마음이 소란스러운 누군가에게 이 글이 닿기를 바란다.



1.생각의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눈으로 읽는 속도보다 손으로 쓰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 그 느린 속도 덕분에 요란하게 소리치던 불안한 감정들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히려 느리게 가는 것이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2. 문장을 온전히 소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문장을 눈으로만 보고 넘기면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손으로 적으면 그 문장은 온전히 내 것이 되고, 머릿속에 남았다. 문장이 가진 온도가 손끝에 남았다.

3. 잡념이 사라지는 몰입을 경험했다. 글씨를 바르게 쓰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나를 괴롭히던 지난날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직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4. 작가의 숨겨진 의도를 발견했다. 눈으로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접속사 하나, 쉼표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가 왜 이 단어를 선택했는지 곱씹게 되며 책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다 읽고 쓰고 난 후에는 작가님과 커피 챗을 한 기분까지 들었다.

5. 나만의 문체와 어휘가 쌓였다. 매일 좋은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어느새 내 글에도 그 결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휘력이 조금씩 말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6. 작은 성취감이 매일 쌓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드는 날에도 필사 노트 한 페이지는 남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쌓여갈 때면 나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증거가 되어 마음이 풍성해졌다.

7.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나의 힘듦을 글로 적거나 위로가 되는 문장을 적다 보면 내 상황을 제3자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감정에 잠겨 허우적 되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8. 악필이 교정되고 마음이 정돈되었다. 천천히 정성 들여 쓰다 보니 글씨체가 예뻐졌다. 글씨가 예뻐지니 헝클어졌던 마음가짐도 예뻐지는 것 같았다. 더 예쁘게 쓰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9. 더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인간의 뇌는 손을 움직일 때 더 잘 기억한다고 한다. 손을 움직이는 것이 소근육 운동이 되어 뇌 건강에도 좋다. 감명 깊게 읽은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어두면 굳이 다시 책을 펼치지 않아도 그 문장을 기억하고 마음속에서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었다.

10.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좋은 문장을 나에게 들려주는 것, 그것은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선물이었다. 필사를 하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아껴주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나는 아이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짐 정리를 잘 못하고, 가끔은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다짐은 작심삼일로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읽고 쓰면 된다는 것을. 사각 거리는 만년필 소리 속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매일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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