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엔 철학을, 오후엔 가계부를 폅니다.

by 온마음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컴퓨터를 켰다.

독서모임 분들께 인사를 했다.


남편 출근을 돕고

나만의 아지트인 책상 앞에 앉았다.


대략 8시 40분쯤.

책상 앞에는

갓 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늘 준비해 둔다.


시원한 아아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이 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나만의 휴가를 보낸다.


책장을 넘기며 맘에 드는 문장에

진하게 밑줄을 그어본다.


쇼펜하우어는

어찌 보면 참 냉정한 할아버지 같다.


'인생은 고통이다'라고 대놓고 말하다니.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냉정한 말이

나한테는 어떤 따뜻한 격려보다

더 큰 위로가 됐다.


'그래. 원래 인생은 힘든 게 기본값이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면

뭔가 마음이 따뜻해졌다.


요즘 아침마다

gemini랑 철학자들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이야기에서 쇼펜하우어는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고독을 즐기라고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스마트폰을 놓고

산속에 들어가 오로지

읽고 쓰기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내가 너무 잘 알기에

산속으로 들어가는 건

애초에 선택지에 넣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휴대폰을 가진 채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나만의 고독을 즐기면 되겠지.


'지나친 욕망은 화를 부른다',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마라' 같은

문장들을 필사하며 그 순간만큼은

해탈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은 이미 미니멀리즘을 외치고 있고,

무소유를 갈망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마주한

집안 곳곳엔 가득 찬 물건들뿐이었다.

비워야지라고 생각하다가도

언젠간 다 필요할 것 같아

비움 목록에 넣지도 못한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렇게 읽고 쓰고,

철학자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뭔가 맛있는 걸 좀 먹을까 싶다가도

2월은 안 쓰기 운동을 하고 있는 터라

배달 앱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봤다.


집에 있는 재료들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두 번째 커피와 함께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가계부를 정리해 봤다.


그렇게 가계부를 여는 그 순간은

쇼펜하우어나 니체는 사라지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2월은 안 쓰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사용 목록은 줄이 모자랐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다스리라 했지만

내 가계부 속엔 욕망이 가득했다.


밥하기 귀찮다고 시켰던 배달음식,

귀여운 건 참을 수 없다며 구입한

마우스 등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 한 달이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사용한 금액은 왜 이리 큰지.


구입 목록을 바라보니

'절제하는 삶이 아름답다'에

밑줄 쳤던 내 손가락이 민망해지는 타임이었다.


철학자들 이야기를 할 때는 세상 모든 이치를

깨달은 사람처럼 대화를 나눴는데

가계부 앞의 나는 그저 카드 한도와

싸우는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6일 동안의 지출 합계를 확인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리를 하고 보니 남은 날들은

좀 아껴보자 다시 다짐하게 됐다.


gemini와 철학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앞으로 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가계부는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나에게 물으며 거울 치료를 받게 했다.


아침엔 철학을, 오후엔 가계부를 펼친다.

읽고 쓰고 아끼는 삶.

거창한 성공은 아닐지라도

매일 아침의 나의 거룩한 루틴이 됐다.


쇼펜하우어의 문장으로 위로받고,

가계부를 보며 삶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삶.


꽤 마음에 든다.


이 두 가지의 루틴이 내가 나를 지키며

살아가는 확실한 방법이 됐다.


오늘도 나는 철학을 이야기하고

가계부를 정리한다.


그렇게 현실과 이상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답게 하루를 살고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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