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갈비

by 수지리

우리 엄마는 LA갈비를 자주 해주셨다. 그리고 참 맛있게 양념을 해주시곤 했는데, 기름을 때지 않아 유난히 지글지글한 그 갈비는 뼈에 붙은 힘줄까지 뜯어먹고 나면 입술이 번들번들했다. LA갈비는 소의 갈비뼈를 양념하여 구운 갈비다. 어려서부터 항상 궁금했다. 왜 한국 음식인데 미국 LA(로스앤젤레스)의 지명이 들어있을까. LA갈비는 20세기 초반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의 바비큐 문화와 한국의 갈비구이 방식을 결합하여 먹던 방식으로, 1960년대 이후 더욱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LA갈비는 소의 갈비를 수직으로 잘라서 연골 부분을 포함한 형태로 '프렌치 컷(French cut)'으로 손질하는데, 이는 갈비뼈의 끝부분을 정리하여 고기 부분이 더 잘 보이도록 하는 방법이다.


예전에 쿠웨이트에 살 때, 한국에서 중요한 회사 손님이 오실 때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식사 자리에 데리고 가시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나에게 항상 어른들 앞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된다 당부를 거듭하셨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온 어느 날, 단정하게 원피스를 입고 앞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헤어밴드를 하고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우리가 가족끼리도 자주 식사하던 호텔 뷔페식당이었다. 아빠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셨고, 우리를 소개해주셨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높은 분에게 인사를 한 뒤 엄마를 따라 조용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엄마는 넓은 테이블에 나를 혼자 두고 가셨고, 엄마 아빠는 따로 다른 테이블에 손님들과 앉으셨다. 항상 말이 많던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시간은 쉽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가 조용히 그릇을 챙겨 들고 조명이 비치는 음식들을 차례로 보며 뭘 먹을까 살펴보았다. 내 눈에 제일 먼저 띈 건 잘 구워진 스테이크. 꼭 엄마가 집에서 해주는 L.A 갈비 같이 생겼다. 한 덩이를 집어서 접시에 담아 다음 음식을 고르려는데, 저쪽에 엄마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엄마 옆으로 뛰어갔다. 엄마는 옆에 다른 사모님과 얘기하고 계셨고, 나는 접시를 배 쪽에 대고 계속 음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접시의 윗면을 배 쪽에 기울여서 대자마자 접시에 담겨있던 고기는 쭈욱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무너져 내렸다. 접시 위엔 흘러내린 고기 육즙 자국이 길게 남아있었고, 바닥엔 덩그러니 고기가 놓여있었다. 난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고, 아무도 못 본 걸 확인하고, 주저앉아 재빨리 그 고기를 접시에 담았다. 조숙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기를 통째로 떨어트린걸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볼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렸고, 나는 얼른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른 테이블에서 아빠는 손님들과 심각한 얘기를 계속하고 계셨고, 난 오빠와 앉아 얌전히 밥을 먹었다.

지금도 뷔페에 가면 그날이 생각날 때가 있다. 어느 날엔가 가족들과 함께 뷔페에 간 날, 고기를 접시에 담으며 피식 웃자, 궁금해하는 딸들에게 어릴 적 그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었다. 딸들은 배꼽이 빠져나가라 웃으며 접시를 이렇게 기울였냐 저렇게 기울였냐 물어가며 흉내를 냈다. 나의 어린 날들이 아이들에게 재밌는 이야기가 되는 사실이 새삼 행복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렸을 적 내 입을 즐겁게 해 줬던 엄마표 마늘 듬뿍 넣어 간장양념에 재워 구워준 L.A갈비는 우리 딸들도 좋아하는 반찬이다. 특히 둘째 딸은 양념된 고기를 참 잘 먹어서 어려서부터 가위로 송송 잘라 갓 지은 밥 위에 얹어주면 입을 쩍쩍 벌리고 받아먹고는 했다. 나는 꼼꼼하고 손끝이 야문 남자와 결혼했다. 미술도 전공한 나지만, 목걸이 줄이 꼬이면 푸는 것도, 꽁꽁 묶인 매듭 푸는 것도 항상 남편에게 부탁한다. 생선을 먹어도 다 먹고 나면 큰 가시만 달랑 만화처럼 남겨두고 발라내는 실력 덕분에, 예전부터 밥 먹을 때 아이들 생선 발라주거나 고기 뼈 발라주는 건 신랑 역할이었다. 내가 L.A 갈비를 구울 때면, 신랑은 힘줄이나 기름 하나 없이 살코기만 깨끗하게 분리해서 가위로 먹기 좋게 가지런히 잘라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러면 남편과 나는 뼈에 붙은 힘줄까지 붙어있는 남은 고기를 같이 뜯어먹는다. 그러니 식사시간이 끝나고 나면, 모든 갈비뼈는 우리 앞에만 있다.


엄마표 L.A갈비를 나보다 더 좋아하던 건 사실은 우리 친할머니었다. 친할머니는 7남매를 낳아 키우셨지만, 그 옛날 월북한 시댁식구의 자손들까지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당시 경기도 서정리에서 약국을 하던 친할아버지는 아빠를 포함한 아빠의 형제들과 사촌형제들까지 서울로 유학을 보내 공부시키셨고, 그래서 아빠는 동기간에 사이가 유난히 가까웠다. 친할아버지는 엄마가 시집오기 전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결혼 초기부터 아빠를 따라 외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이어갔다. 쿠웨이트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친할머니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친할머니는 따뜻한 미소를 가지고 계셨고, 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하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참 좋아했던 나는 그날 아침 학교를 안 가고 공항에 할머니 마중을 가겠다고 억지 생떼를 부렸었다. 결국 나는 입이 주전자 주둥이만큼 나온 채로 등교했고, 하굣길에는 달리는 차 안에서도 달리는 기분으로 마음이 조급했다. 지금도 그날 문을 열어주던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비행기가 뜨지 않아서 할머니가 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눈물이 쏟아지려는 찬라, 엄마의 뒤에서 나를 놀라게 하며 나오는 할머니의 표정도 잊을 수가 없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 나를 그렇게 짓궂게 놀라게 한 건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물었을 때, 엄마는 할머니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해주셨다.

할머니는 이가 아주 조그만 옥수수알들 같았다. 활짝 웃으실 때면 작은 옥수수알들이 가지런히 반짝였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치아가 다 망가졌는데도 어찌 그리 잘 드시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엄마가 L.A갈비를 재워 저녁으로 굽는 날이면, 할머니는 양손으로 뼈를 잡고 뜯어 드셨고, 손에 묻은 양념까지 쪽쪽 빨아서 드셨다. 갈비를 특히 좋아하셨기에, 보통 성인 2인분은 족히 되는 양을 드셨다. 할머니는 피자도 잘 드셨는데, 가끔 엄마가 오늘 저녁을 무얼 할까요 여쭈어보면 그 치즈가 찍찍 늘어나는 넓적한 빵 같은 걸 먹고 싶다고 하시곤 했다. 당시에 피자헛에서 슈퍼슈프림 피자 라지 사이즈를 주문하면 3조각을 드시고야 배를 두드리시며 활짝 웃으시던 할머니 얼굴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주무실 때면 나는 밤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며 할머니 옆에서 잠들었고, 엄마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반찬을 항상 준비하셨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할머니는 정말 맛있게 잘 드셨다. 그렇게 잘 드시는 할머니가 난 참 좋았다.


우리 엄마는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요리하셨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칼질을 하던 엄마의 뒷모습은 가끔은 춤추는 것 같아 보였다. 보글보글 끓는 국 냄비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먹는 모습은 소녀같이 사랑스러웠고, 나물을 조물조물 무치는 모습은 제법 요리사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고,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전부 맛있었다. 난 우리 엄마가 해주는 밥상을 먹고 자랐고, 그 밥상이 내가 되었다. 엄마가 요리하던 모든 모습과 그 사랑을 먹고 그 음식의 맛과 향기가 담긴 사람이 되었다. 지금 내가 남에게 요리해 주기 좋아하고, 나누기 좋아하는 건 아마 내가 바로 그런 밥상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한다는 건 정성 이상의 마음이 들어가는 일이다. 전화 교환원을 통해 전화를 하던 시절에서, 공중전화, 삐삐, 폴더폰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떼 밥을 하던 시절에서,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인덕션, 오븐 그리고 이제는 닌자콤비 같은 에어프라이어로 한 번에 두 가지 요리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자동화가 되어도, 아무리 사람을 대신하는 AI가 출시되어도, 그 어떤 것도 엄마는 될 수 없고, 엄마의 밥상도 차릴 수는 없다. 엄마의 밥상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탯줄로 이어져 과거형이 될 수 없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차리는 밥상에는 엄마가, 그리고 엄마의 마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LA갈비,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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