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

by 수지리

떡국은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으로서, 특히 설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다. 우리나라는 해가 바뀌면 한 살 더 먹는 방식으로 나이를 세어왔는데, 떡국은 바로 그 방식의 상징이며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설날을 좋아했다. 떡국이 맛있기도 했고, 한복을 입고 아빠 엄마께 새배를 하고 나면, 항상 아빠는 오빠와 나를 앉혀놓고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셨는데,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가끔 아빠는 '넌 왜 사니?'라는 심오한 질문도 하셨는데, 나는 이 질문에 특히 착하고 옳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께 칭찬을 받고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 나의 온갖 인정욕구와 결합하여 잘 만들어진 '옳은' 대답을 생각해 내곤 했다. 이를테면 '오늘을 어제보다 나은 하루로 만들기 위해 살아간다' 라던지, '하느님을 찬양드리기 위해서'라는 등의 대답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느 날 아빠의 질문에 오빠는 '오늘이 오니까 살죠'라는 대답을 했다. 오빠의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두 번 놀랐는데, 나처럼 몇 날 며칠을 고민해 억지로 생각해 낸 '척'을 하는 착하고 싶은 대답이 아니어서, 게다가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어서였다. 오늘이 오지 않는다면 우린 살 수 없다. 오늘이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물론, 당시 사춘기를 지나가던 오빠의 반항심에 아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 위해' 한 대답일 수도 있었겠지만, 분명 군더더기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이었다. '오늘이 오지 않는 날'은 우리 엄마 아빠 두 분 모두에게 왔고, 그 '끝' 이후 나는 단지 주어진 오늘 하루부터 열심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다.


떡국은 맑게 멸치나 야채로 육수를 내어 떡을 넣고 기본 간을 하고 맑게 끓여내 고기고명과 달걀지단과 파, 김고명을 올려 깔끔하게 끓여내는 방식도 있지만, 우리 엄마가 끓이던 방법대로, 고기를 참기름에 달달 볶아 국간장, 마늘로 간을 하고 물을 부어 육수를 내고 떡이 익으면 대파를 넣고 계란을 몇 개 풀어 국자로 휘휘 저어 그릇에 담아내는 방식도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엄마가 냄비에 참기름에 고기를 넣어 국간장으로 간을 하고 나무 주걱으로 볶을 대면 그 냄새가 너무 고소해서 난 항상 부엌으로 가 엄마에게 그 고기 한 조각을 얻어먹곤 했다. 앞니로 그 고기를 받아 물어 호로로 불며 혀로 굴려가며 먹노라면 입천장을 데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실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살았고, 친척집도 없이 한국 음식점이 귀한 생활이었기에 내게 한식은 집밥이었고, 엄마의 요리였다. 그러다 언젠가 사촌 언니가 내게, '난 작은엄마가 끓이는 떡국이 제일 맛있더라. 고기 볶아서 계란 풀고 김 들어간 고소한 그 떡국. 기름 진데 정말 맛있어'라고 말하던 그즈음엔, 엄마의 한식은 적당히 기름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쿠웨이트에서 맞이하는 설날에는 집에 100명 정도 되는 손님들이 왔다. 그럴 때면 거실과 복도, 우리 방까지 상을 펴서 가득가득 손님들이 앉았고, 엄마는 커다란 들통에 육수를 내서 떡을 끓여서 퍼내고 또 끓여서 퍼내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떡국을 담아냈다. 초록색 무늬가 그려진 코렐 접시에 엄마가 떡국을 담아주면 김가루를 솔솔 뿌려서 4그릇 5그릇씩 쟁반에 담아 손님들에게 나르는 건 내 몫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거운 쟁반도 균형을 잡아 잘 날랐고, 한 그릇씩 손님들에게 내려놓는 것도 작은 몸을 바닥에 살짝 쪼그려 앉아 상 한 귀퉁이에 쟁반의 한쪽을 얹고 한쪽 무릎에 쟁반의 다른 한쪽 끝을 올려두고 한 그릇씩 옮겼다. 그럴 때면 아저씨들이 이쁘다며 세뱃돈도 주시고 칭찬도 많이 해주셨다. 엄마의 떡국은 냄비에서 퍼내면 다시 채워졌고, 떡국이 담긴 그릇은 비워졌다. 마치 자식에게 주는 부모님의 사랑 같았다. 부모님은 계속 무한대로 끓여서 담아내 주지만, 자식들은 받은 걸 바로 비워버린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엄마는 냄비 벽에 붙은 불은 떡국을 좋아했다. 항상 떡국을 끓이고 난 다음날이면 냄비벽에 붙은 불은 떡국을 데우지 않을 채 드시곤 했다. '엄만 이게 참 맛있더라' 라며 웃으며 떡을 드시던 엄마의 미소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도 가끔 뺏어먹곤 했는데, 쫄깃한 떡이 고기육수와 계란과 엉겨 붙어 꼰작꼰작해져 있는 상태 그대로 수저로 긁어먹는 맛은 호호 불어 먹는 뜨거운 떡국과 다른 맛이었다. 나도 엄마를 닮아 불은 떡국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떡국을 끓이면 언젠가부터 냄비에 조금씩 남겨두고 상을 차린다. 나 혼자만 아는 비밀을 대하는 설렘으로, 식을 때까지 두었다가 떡을 떼어먹는 건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남겨놓은 떡을 보면, 신랑은 그 비밀을 애써 지켜주듯 내게 아는 척을 한다. 한 손으로 냄비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수저를 들고 불은 떡을 떼어먹던 내 기억 속 엄마의 모습 그대로 나도 똑같이 먹는다.


딸들이 어렸을 땐 떡국을 많이 끓였다. 떡을 먹기 좋게 가위로 잘라 수저로 퍼주면 아이들도 잘 먹고, 아이들이 먹고 남은 떡국을 뽀로로 국그릇에서 그대로 퍼 먹고 있으면 나의 엄마처럼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내 젖을 물고 배고픔을 채우던 아이의 눈을 맞추며 느꼈던 뭉클하고 짜릿했던 것과 유사하게, 내가 한 요리를 아이들이 먹고 있노라면 기쁨 이상의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쾌감 덕분에 나는 딸을 갓 출산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요리를 하며 난 모성애를 확인하고, 아이들의 먹는 모습에서 내가 엄마임을 확인받는다.


나는 두 딸을 키우고 있지만, 아직 엄마라는 역할보다 딸 역할이 더 익숙하고 편안하다. 눈을 뜨자마자 도시락을 준비하고 아침밥을 하며 딸아이들의 등교를 지켜보는 것으로 나의 일과를 시작하고, 엄마로 하루를 살지만,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울 때면 난 다시 엄마 아빠의 딸로 돌아가 잠에 든다. 아직 그게 더 나 같고 더 편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자주 외롭다. 딸들은 있지만, 엄마 아빠는 없기에. 그 외로움의 자국은 이미 내 몸에 짙게 자리 잡아 다른 의미로는 이제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하루하루 갈수록 엄마의 임종을 지켜본 아픔과 슬픔은 옅어져 갔지만, 그리운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엄마 대신 아빠의 밥상을 차리고, 점점 깊어가는 아버지의 병을 돌보면서 세월이 흘러 이제 난 엄마가 알던 나의 모습에서 많이 나이 들어버렸다.

새해가 밝아 떡국을 먹을 때면, 나는 생각에 잠긴다. 한 살 더 먹은 나의 나이와 그 나이 때의 과거의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는 지금 내 나이의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 내 나이의 엄마를 과거에 본 적이 있다. 떡국 한 그릇에 엄마는 추억으로 살아난다. 그래서 더더욱이 내게 밥상은 내가 엄마가 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나는 요리를 매일매일 한다. 내가 엄마가 되는 방법이다. 여기서 내가 엄마가 되는 방법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배속으로 나은 두 딸의 엄마,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되는 것.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크고 작은 구멍이 되어, 그 구멍 사이로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는 가끔 나를 너무 시리게 한다. 가끔 그 시림이 너무 아리면 한밤 중에라도 부엌에 들어가 그다음 날 먹을 국을 끓이든, 감자를 삶든, 밥을 짓든 따뜻하고 습한 수증기로 공기를 채운다. 그러면 그 온기로 나의 구멍을 따뜻하게 데운다. 나는 요리하며 엄마가 되어 내 자신에게 치유와 위로의 몸짓이 된다.


엄마의 떡국,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

keyword
작가의 이전글L.A 갈비